술을 꿀떡꿀떡 맛있게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술 잔을 높이 쳐들어, 마지막 한방울까지 아쉬운 듯 털어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볼 때는 나까지 매우 아쉬워진다. 여기서 ‘꿀떡꿀떡’은 물론, 음료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소리 ‘꼴딱꼴딱’의 의성어 표현을 과장한 것이지만 말 그 대로 ‘꿀’과 ‘떡’의 조합이 연상되어, 단 것을 좋아하는 나는 저 투명한 술에 분명 설탕이 들어가 있겠거니 한다. 신화 속 신들이 연회에서 마셨다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넥타(Nectar)가 분명 하겠거니 한다.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먹어도 어른의 맛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순수한 궁금증이다.

술을 홀짝 홀짝 음미한 후 얼굴 색 하나 바뀌지 않고 일어나 우아한 걸음으로 홀연히 술 자리를 떠날 줄 아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 술을 꿀떡꿀떡 마신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아마도 평소에 술이 꽤 ‘고픈’ 사람에게나 이러한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평생 술을 입에서 뗀 적이 없는 미국의 시인 존 베리먼(John Berryman)이 그의 시 <꿈의 노래>에서 쓴 시구를 보면 그의 목 넘김이 쉽게 상상이 간다.

‘….. 왜 그렇게 끊임없이 마시냐고?
나는 즉석에서 내가 묻고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야, 목이 마르니까.’

목마름으로 술을 찾는 사람이 못 되는 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갈 때의 그 꿀떡 꿀떡의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는 편이라 그 순간은 술이 ‘술술’ 들어가는 때 에야 비로소 찾아온다. 그러나 이 순간은 모두 예상하듯이, 꿀 맛은 고사하고 아무 맛도 못 느낄 정도로 얼큰히 취하는 때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꿀떡’의 소중한 순간이 생략되고 바로 ‘술술’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아쉽고 억울하다.

소용돌이 치는 고흐의 그림 혹은 가슴을 뜨겁거나 서늘하게 만드는 음악을 들으면 도무지 제정신(?)인 사람이 만들었을까 싶다. 이건 분명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깅을 한 후 화목한 가족에 둘러싸여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작품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일 것이다. 위의 존 베리먼 처럼 글을 쓰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잠든 칠흑 같은 밤에 작가는 타자기 혹은 모니터 하나만을 마주하고 철저한 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낮과 밤이 바뀌고 머리는 덥수룩하다. 자꾸만 엇나가는 글 앞에서 담배는 신경을 이완시켜 줄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술이 있다. 새로운 영감을 위해 아니면 어린 시절의 끔찍한 트라우마와 슬픔 그리고 현재의 고뇌와 비틀린 욕망 등을 토해내느라 고통스러운 작가를 오랜 동안 위로해 오고 마지막에는 종종 파괴해 왔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의 희곡을 쓴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사람은 왜 술을 마실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뭔 가에 잔뜩 질려서 이고, 두 번째, 어떤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입니다. 경우에 따라 이 둘 중 하나나 둘 다의 이유로 술을 마시게 됩니다.’

어쩌면 그렇게 나를 잘 아시나요? 나도 한때 그런 답답한 마음으로 마셨던 적이 있다. 마치 내 편을 얻은 것처럼 반가워 테네시 윌리엄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한마디로 ‘홧김에’ 마셨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나 그 속에 있는 누군가가 화의 대상이었지만, 그게 사실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위스키를 하루에 약 1리터가량 마셔 대곤 했던 당시의 작가들에 비하면 조금 가소롭다 고나 할까. 내 경우에는 그게 맥주였고, 견딜 수 없는 정도의 참담한 고통이나 슬픔, 작품을 탄생시켜야만 하는 소명 같은 것도 없었기에 홧김에 마시는 기간은 다행히 길지 않았다.

도수가 높은 증류주 등을 스피릿(Spirit)이라고 부르는데, 가열 후 증기를 모아 액체 형태로 만들어지는 알코올이 마치 세상의 본질(essence) 즉 영혼(spirit)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림:송정하)
도수가 높은 증류주 등을 스피릿(Spirit)이라고 부르는데, 가열 후 증기를 모아 액체 형태로 만들어지는 알코올이 마치 세상의 본질(essence) 즉 영혼(spirit)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림:송정하)

프랑스에서는 술을 광고하는 지면의 맨 하단에 작은 글씨로 ‘꽁쏘메 아베크 모데라씨옹(A CONSOMMER AVEC MODERATION)’, 즉 ‘절제해 가며 마셔요’ 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 ‘절제(modération)’라는 단어가 너무 엄숙하고 심각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어렸을 적 피아노 같은 악기를 배웠거나 학교 음악시간에 악보를 조금이라도 눈 여겨 본 사람이라면 연주의 속도를 나타내는 표현 ‘모데라토(moderato)’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느리게’를 뜻하는 아다지오(Adagio)나 ‘빠르게’를 의미하는 알레그로(Allegro) 등과 비교하면, ‘보통 빠르기’를 말하는 모데라토는 조금 시시하고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모데라토에서 파생된 이 모데라씨옹 즉 절제라는 말도 알고 보면 참 개성 없고 재미없는 단어다.

이제는 과음을 하지 않는 나는 결과적으로 ‘절제’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나도 시시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사람은 호감가는 인물이 되기 쉽지 않다. 술잔을 더 권하면 ‘아, 저는 그만 됐습니다’ 하고 술잔을 ‘탁’ 하고 내려 놓는 모습이 내가 봐도 참 얄밉다.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 물을 확 끼얹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차라리 자리에서 얼른 물러나 주고 싶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서 술을 잘 마시고 주위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

가끔은 불꽃처럼 살다가 어느 순간에 확 사그라드는 삶이 멋져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작품과 흔적을 명확히 남겨 불멸로 존재하는 몇 몇의 예술가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특별한 재능도 없을 뿐더러 그에 비할 수 없는 노력을 투자할 엄두가 나지 않는 나는 그저, 까딱하다가 100세까지 살 지도 모를 우연에나 대비해야 한다. 그것은 큰일이다. 소근소근 오래 가는, 가느다란 불빛 같은 삶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모데라토’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송정하 소믈리에는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책 <오늘은 와인이 필요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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