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한 호텔에서 열린 이탈리아의 와이너리, 꿰르챠벨라(Querciabella)의 시음회에 다녀왔다. 국제적인 품종과 이탈리아 토착 품종을 아우르는 와인들의 향긋한 풍미가, 아직은 싸늘한 서울의 밤을 따듯한 바람이 부는 토스카나의 포도밭 한 가운데로 데려다 주었다. 하나씩 나오는 맛있고 예쁜 음식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과일 무스에 상큼한 지중해 맛 와인 이라니.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조금씩 오물거리면서도 한 손에 든 휴대폰을 보느라 다들 정신이 없다. 모두 바쁜가 보다.

음악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먹으며 이탈리아 현지에서 오신 분들의 와인 프레젠테이션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설명을 들으며 마시면 맛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고장의 전통과 기후에 맞게 공들여 와인을 만든 사람을 서울 한복판에서 직접 만나는 것은 역시 고마운 기회이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우리의 표정을 보는 그들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아시아 담당 디렉터 한 분이 휴대용 대전차 로켓탄 발사기 즉 바주카 만한 므두셀라(Methuselah:6리터, 8병 분량) 병을 직접 서빙 하신다. 그 거대한 병 안에는 1999년산 수퍼 투스칸 와인, 카마르티나(Camartina)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 분, 10미터 거리에서 언뜻 봤을 때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다니엘 크레이그를 닮았다 했는데 코 앞에서 보니 더욱 흡사하다. 그의 얼굴을 확인 하느라, 카베르네 소비뇽과 산지오베제가 오랜 시간 황홀하게 농익은 와인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도 모르게 꿀꺽 삼켜 버렸다.

다니엘 크레이그 때문에 잠시 정신이 딴 곳으로 새긴 했지만 그 날의 주인공은 꿰르챠벨라의 한 화이트 와인이었다. 그 와인은 자칭 타칭 부르고뉴 화이트의 지중해 버전이라고 불리는데, 흥미롭게도 피노 블랑(Pinot Blanc)이 샤르도네와 같은 비율(50%)을 차지하고 있었다. 살구와 복숭아, 시트러스 등의 과일과 허브, 카모마일의 은은한 터치 그리고 신선한 크리미함 까지. 풍부함과 섬세함이 고른 밸런스를 이루어 과연 이탈리아 최고의 화이트 와인 다웠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최고는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 와인이 ‘바타르(Batàr)’다. 부르고뉴의 황금 마을, ‘바타르 몽라셰(Bâtard-Montrachet)’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다. 테이블을 돌며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꿰르챠벨라의 와인 메이커 만프레드 잉(Manfred Ing)에게, 나는 주책 맞게도 바타르 몽라셰 이야기를 해 버렸다. 알고 보니 꿰르챠벨라의 설립자, 주세페 카스틸리오니(Giuseppe Castiglioni)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바타르 몽라셰 였다고 한다. 그러니 바타르는 일종의 바타르 몽라셰의 오마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며 웃었다.

“네, 그 바스타드(Bastard) 말이에요.”

어원을 찾는 건 참 흥미진진한 일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미스테리를 풀고 나면 사물의 본질에 더 다가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싱거운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괜히 나까지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복잡한 세상에서 대충 살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한없이 유치해진다. 예를 들면, 뒤뵈프(Duboeuf)라는 성을 가진 사람과 조르주 뒤뵈프(George Duboeuf) 와인을 마시며 소고기(Boeuf)를 먹는 상상을 하는 것 말이다. 한국어를 진지하게 배우는 외국인이 김(金)씨라는 사람으로부터 김 선물세트를 받을 때도 이런 느낌인지는 모르겠다.

프랑스어 바타르(bâtard)는 영어의 바스타드(bastard)와 같은 뜻이다. 즉 ‘사생아, 녀석’ 등의 가련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 불경한(?) 단어가 세계 최고급 화이트 와인의 이름에 붙은 것이다. 옆에 있는 같은 등급의 포도밭 이름은 한술 더 뜬다. ‘비앙브뉘 바타르 몽라셰(Bienvenu-Bâtard-Montrachet)’ 즉 직역하면 ‘어서오세요, 사생아 몽라셰 마을에’가 되어버린다. 쑥개떡 처럼 맛만 좋으면 됐지, 그 이름은 알아서 뭐하냐 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치즈와 바타르, 그리고 코로나로 우울한 주방장 (사진: 송정하)
치즈와 바타르, 그리고 코로나로 우울한 주방장 (사진: 송정하)

전하는 바에 의하면(프랑스에서도 궁금 해 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라 그 신뢰성은 믿거나 말거나 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퓔리니 몽라셰(Puligny-Montrachet) 마을의 한 영주가 그의 아들을 전장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끌로 데 퓌셀(Clos des Pucelles: Pucelle은 숫처녀라는 의미가 있다)이라는 곳에서 처녀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몇 개월 후 (당연하게도) 아들 하나를 더 얻게 되었는데, 그 사이 전쟁터로 간 아들은 죽고 만다.

전사한 큰 아들은 이후 ‘기사(knight)’를 의미하는 슈발리에(Chevalier), 이후에 태어난 또 다른 아들은 ‘서자’가 되어 바타르(Bâtard)라 불리고, 영주의 땅은 그들의 이름을 따서 각각 슈발리에 몽라셰(Chevalier-Montrachet)와 바타르 몽라셰(Bâtard-Montrachet)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던 영주는 매일 통곡하며 아들을 부르 짖었는데, 이에 ‘외치다’는 의미의 부르고뉴 사투리 크리오(crio)가 붙어 또다른 최고급 땅 ‘크리오 바타르 몽라셰(Criots-Bâtard-Montrachet)’가 탄생했다.

한편 전쟁터에서 영주의 첫째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마을 주민들은, 바타르라 불리는 둘째 아들을 ‘어서오세요, 바타르 몽라셰 마을에(Bienvenu au bâtard Montrachet)’ 라고 외치며 환호하고 추대했는데, 이 환호의 문장 자체가 또다른 밭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프랑스 최고의 화이트 와인을 흠모하여 그의 전통을 이어받고 나아가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개성과 고집을 추구한 결과, 이탈리아의 바타르(Batàr)는 와인 전문가 휴 존슨(Hugh Johnson) 으로부터 ‘화이트 와인의 꿈(A dream of a white)’이라는 극찬을 들었다고 한다. 이름의 일차적인 뜻은 어쩌면 중요한 게 아닌가 보다. 뭐, 궁금증이 풀렸으니 그걸로 족하지만 말이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송정하 소믈리에는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책 <오늘은 와인이 필요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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