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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하의 와인스케치북] 라벨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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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2.05.18  13: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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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남자 보기를 돌 보듯 하는 것도 재주라면, 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오래전 압구정역 근처를 지날 때 나보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인도를 ‘워킹’하는, 10등신 정도 되는 남자(아마도 모델이리라)를 나도 모르게 5초 정도 쳐다본 적은 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감탄했을 뿐이다. 멋진 피조물이었다. 그것 뿐이다. 오히려 반감(?)이 들 때는 있다. 흥, 어쩌다 반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얻는 불로소득이 얼마나 될까. 치사하게도 인간으로서 질투가 난다.

잘생긴 남자 뿐 아니라 황금 보기도 돌보듯 할 줄 안다. 그런데 황금 앞에선 멋진 이성 앞 에서와 달리 조금의 노력이 필요하긴 하다. 자고로 견물생심이 세상의 이치 아닌가. 다만 갖고 싶은 아이템을 하나 더 해 봤자 그 만족감이 얼마 못 간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인생으로 깨 달았을 뿐이다. 그래서 백화점 7층에 볼 일이 있으면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가고 마트에 생수를 사러 갔으면 달랑 생수만 들고 나와 버린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 내가 어떤 기여를 하며 사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이게 다 웃기는 소리다. 눈과 귀를 열고 충분히 삶과 내 취향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돈을 써가며 말이다! 우선 책은 사서 본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일은 드물다. 새 책의 깨끗함이 좋다. 읽지 않은 책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책을 산다. 크기별로, 분야별로 책장에 책들이 꽂혀 있으면 얼마나 흐뭇한 지 모른다. 어려운 책은 읽지 않으므로 특별히 지성인으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좋아하는 작가의 결과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한마디로 소유의 만족감이 은근히 크다. 그리고 돈을 내고 영화를 보며 가끔 그림을 보러 가고, 무엇보다 와인을 마신다. 결국 소비를 어느 곳에 하느냐 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어쩌고 하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관심사가 월별로 바뀌는 사람인데 한 때는 아무리 친절한 다큐멘터리를 봐도 알아먹지 못할 우주와 블랙홀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미지의 세계의 매력이란 모름지기 전혀 이해하지 못함에 있는 것 같다. 그 아득한 우주와 검은색에 빠져 있던 어느 날은 우연히 인터넷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블랙이라는 반타블랙(Vantablack)이라는 물질을 보았다. 빛을 99.96% 흡수 해 세상에서 가장 진한 검은 색을 내는 것이, 마치 블랙홀이 시공간을 빨아들이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한 연구기업에서 개발한 이 색을 한 예술가가 독점 사용하여 논란이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한 두 권 차곡차곡 사 모으는 나와는 역시 소유의 스케일이 다르다.

그의 작품을 찾아보던 중, 나는 2009년의 한 와인 라벨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프랑스의 샤또 무똥 로칠트(Château Mouton Rothshild)의 라벨이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라는 이름의 인도출신 영국인 조각가는, 공간과 재료, 색채를 통해 세상의 두가지 이치 즉 하늘과 땅, 물질과 정신, 명과 암 등의 상반되는 개념을 표현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다. 샤또 무똥 로칠트가 그런 저명한 예술가를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보르도의 샤또 무똥 로칠트는 하나의 작품과도 같은 와인 라벨로 유명하다. 와이너리로부터 라벨 디자인에 관해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 받을 아티스트가 샤또 무똥 로칠트에 걸맞는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본격적으로 지속되기 시작 된 건, 프랑스의 일러스트레이터 이자 예술사가인 필립 줄리앙(Philippe Jullian)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승리를 기념하는 브이(V)를 새겨 넣은 1945년이다. 살바도르 달리, 후안 미로, 칸딘스키와 피카소 등의 거장들을 거쳐 앤디 워홀과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현대 작가들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아니쉬 카푸어가 불투명 수채화 기법으로 그린 2009년의 무통 로칠트 라벨은, 마치 칠흑 같은 밤에 누군가 몰래 피운 화염 같다. 머지않아 어둠을 온통 뒤덮어 버릴 불꽃 같다. 그것도 아니면 두 손에 묻은 선명한 핏자국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 “빨강과 검정은 땅과 죽음의 색이에요. 우리 문명은 붉은 색 즉 여자의 피, 땅의 여신과 함께 시작 됐는데, 이 태초의 피를 대신 하는 것이 바로 와인이지요.”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고, 꿈꾸고 상상하고 또 그래야만 제대로 숨 쉬고 살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 한 예술가의 사상을 반영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가 이 심오한 주제를 이해 했는지 어쨌는 지는 모르지만, 라벨만 따로 액자에 담고 싶은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과 달리 나는 2009년의 무똥 로칠트 와인 자체를 마시고 싶었다. 분명 더 진하고 강렬할 것이며 이것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그의 말 대로 우리 문명의 기원을 느낄 것 같았다. 라벨의 타오르는 불빛에 홀린 걸까? 이리 와, 어서 마셔봐 하며 말을 거는 것 같다. 그러나 여차 저차 해서 지금껏 맛보지 못했다는 딱한 결말이다.

나를 유혹하는 화이트 와인 중에는 개구리 한 마리도 있다. 자국의 아티스트 작품으로 라벨을 장식하여 일명 ‘아트 시리즈’로 유명한 호주의 와이너리, 루윈 에스테이트(Leeuwin Estate)의 리슬링이다. 호주의 화가 존 올슨(John Olsen)의 그림 속에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역동적으로 헤엄치고 있다. 활기차고 천진한 그림체가 마치 동요의 한 소절 같다. 퐁당거리며 움직이는 개구리의 리듬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래서 이 이미지는 와인의 색, 향과 맛, 와인 잔에서 찰랑이는 경쾌한 소리까지 내가 생각하는 호주의 리슬링과 겹친다.

▲ 진한 레드 와인을 만드는 캘리포니아의 ‘오린 스위프트(Orin Swift)’는 와인 메이킹 만큼이나 공들이는 ‘라벨 메이킹’ 으로 유명하다. (사진제공:오프너스)

이 정도면 와인업자들도 대단한 것 같다. 잘 생긴 남자가 팔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한 순간에 길거리를 런 웨이로 만드는 장면에서도, 유명 메이커들로 도배한 백화점 속에서도 앞만 보며 직진하는 나를, 독창적이고 위트 있는 와인 라벨 앞을 한 참 서성이게 만든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내 멋대로 상상하고, 와인의 맛과 연결시키고 싶어 진다.

그런데 이게 나의 경우만은 아닌 것 같다. 한 조사에 의하면 소비자들의 약 80%가 라벨을 보고 와인을 고른다고 한다. 그 ‘라벨’이라는 것이 전통 있고 명성 있는 와인의 이름값인지 아니면 순전히 디자인을 말 하는 건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만 그런 건 아니잖아요’ 라는 변명을 할 수 있어 나에겐 참 위로가 되는 통계다. 그러고 보니 또 그렇다. 착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 지 어떻게 알겠나. 사람의 겉 모습 즉 라벨이 먼저 보이니 어쩌겠는가.

1973년 샤또 무똥 로칠트는 그 해 세상을 떠난 20세기 최고의 화가를 기리기 위해 피카소의 작품을 택했다. ‘우리 영혼에서 일상의 먼지들을 씻어주는 존재가 곧 예술’이라고 말 한 피카소 식으로 말하자면, 와인도 예술이고, 디자인도 예술이며 우리를 즐겁게 하는 각자의 취향도 모두 예술인 것 같다. 그래서 잘생긴 남자 ㅡ 남성분께는 여자가 되겠지요 ㅡ 를 보면 ‘예술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건가,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 이지만 말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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