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다. 어릴 때는 엄마가 수고스럽게 만든 피자 앞에서 난데없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해 매를 벌기도 하고, 성인이 된 지금도 어쩌다 돈까스를 먹는다 치면 옆에 앉은 사람이 먹는 메밀국수가 어쩐지 더 맛있어 보이는 식이다. 먹는 데 있어서 짓궂고 탐욕스러운 편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식탐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요새는 외식 물가가 많이 오른 탓에 이럴 바에 돈을 조금 더 주고 뷔페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특별한 날, 무리를 해서 찾는 호텔의 고급 뷔페 같은 곳은 아닐지라도 가끔 뷔페형 레스토랑을 갈 때가 있다. 때로는 다른 식당과 가격 차이가 없어서 굉장히 이득을 보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뷔페란 곳을 생각하면, 솔직히 말해 한숨부터 나온다.

아직도, 정말 제대로 잘 먹겠다(‘본전을 뽑겠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오하며 뷔페에 입장하는 촌스러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접시를 집어 들고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음식들을 한번 쓱 조망할 때에 나도 모르게 기합이 들어간다. 요새 김밥이 있는 뷔페는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뷔페에서 김밥이나 치킨을 먹을 나이는 지났다.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샐러드로 가볍게 시작을 하고 귀한 생선이 들어간 회와 초밥을 조금 먹은 후 전복이 들어간 주방장 특선 요리 혹은 레스토랑에 따라 대 게나 바닷가재로 이어지는 식사 순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선택한 요리는 모두 한 젓가락 분량을 넘으면 안 된다. 하도 진지해서 한 손에 든 접시가 싸움터로 나가는 기사의 방패 같기도 하고, 너무 긴장을 하면 이 순간이 전장 속에서 받는 눈물 나는 식사 배급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비장한 계획은 샐러드에 달콤하고 진한 드레싱을 듬뿍 붓는 순간부터 삐걱거린다. 그리고 입맛에 꼭 맞는 초밥을 몇 조각 다시 한번 가져다 먹고 나면 이상하게도 뜨끈하고 진한 이국의 수프가 당긴다. 마음에 들면 한 번만 먹는 법이 없다. 한 주걱 더 먹고 나면, 이제는 늘 함께하면서도 그리운 한식 차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잡채를 지나칠 수가 없다. 집에서 만든 것에 비하면 채소와 고기를 압도하는 양의 살짝 불은 당면일 뿐인데,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이탈리아 음식 다큐에서 본 몇 종류의 파스타도 먹어야 할 것 같다.

아직 먹어야 할 게 많은데, 겨우 두 접시 먹었을 뿐인데, 너무 배가 부르다. 부지런히 음식을 퍼다 나르며 바쁘게 움직였는데 소화될 기미가 없다. 상대방과 수다를 많이 떨면 금방 소화가 된다는데 오늘은 왠지 할 말도 별로 없고, 그저 음식이 너저분하게 놓인 접시만 쳐다보니 고개가 점점 숙여진다. 오늘의 뷔페도 어쩐지 망한 것 같다. 먹은 것을 대충 따져보니 지불할 가격에 비하면 아무리 봐도 손해다. 역시 한 가지 음식을 파는 식당에 갔어야 하나. 더 먹지 못해 아쉬운 마음 앞에서, 오늘도 지구상 어딘가 아니 내 주변 어딘가에서 끼니를 거르고 있을 사람들까지 떠올라 자괴감이 든다. 이런 바보. 스스로 화가 나 무한 리필이라는 생맥주를 한 잔 들이켰는데 이런, 이곳은 생맥주 맛집이었나 보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 뭐부터 먹고 마실지 고민이다. <사진=송정하>

반복되는 뷔페에서의 시행착오 앞에서, 만약 와인 뷔페가 있다면, 나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물론 술을 밥처럼 배부르게 먹는다면 그곳은 난장판이 될 테지만 만약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전 세계 와인이 즐비한 고급 와인 뷔페를 생각하면 런치 혹은 디너 가격이 상당히 비쌀 것 같다. 그러나 재료와 원산지, 요리법 등을 쉽게 알 수 없는 음식 뷔페에 비하면 이 와인 뷔페에서의 와인 선택은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이름과 원산지, 제조자와 그로 인한 명성과 가격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언컨대 내가 공략할 와인은 피노 누아, 그중에서도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이다.

피노 누아(Pinot noir)로 만든 와인은 비싸다. 피노 누아 포도는 재배하기에 대단히 까탈스럽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껍질이 얇아 포도나무 병에 취약하고, 포도 알은 너무 빨리 익어버려 서늘한 기후가 필수적이다. 관리하기 까다로워 손이 많이 가지만 생산량은 적어 당연히 값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욱더 귀하신 몸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는 프랑스의 부르고뉴(Bourgogne)산 피노 누아 와인이다. 부르고뉴 하면, 뷔페를 떠올릴 때처럼 한숨이 나온다. 그야말로, ‘아! 부르고뉴!’ 다. ‘산산이 부서지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의 처절한 시구가 맥락도 없이 떠오를 정도다. 찬양과 감탄의 한숨이라는 점에서 앞의 한숨과 다르지만, 아무래도 영원히 정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은 뷔페를 생각할 때의 한숨과 비슷한 것 같다.

부르고뉴는,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비할 데 없는 복합미와 깊은 향이 나는 최고의 피노 누아를 생산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높지만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밭은 전 세계의 1%에 불과하고 프랑스 포도밭의 4% 밖에 안되어 공급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부르고뉴에 사는 주민조차 로컬 와인을 마실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말 그대로 ‘위대한 부르고뉴’다.

부르고뉴를 생각할 때 한숨이 나오는 또 다른 이유는, 와인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외워야 할 지식의 양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 중 하나가 부르고뉴로서, 와인의 품질을 가장 오래 연구해 온 곳 역시 부르고뉴다. 이곳의 대규모 토지를 소유했던 교회 수도사들은 이미 포도밭 구획마다 서로 다른 와인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2미터마다 토양의 질이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부르고뉴에서는 포도밭 구획을 나타내는 말로 ‘클리마(Clima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오늘날 그 작은 클리마는 또 여러 명의 재배자들이 잘게 나눠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부르고뉴의 이 작고 소중한 밭뙈기들을 가리켜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패션업계에서 고급 맞춤복을 뜻하는 단어) 포도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말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고뉴의 큰 도시와 지역 이름 그리고 하나하나 고귀한 브랜드가 되는 마을과 포도밭 이름들을 외우고 있자면, 요샛말로 일종의 ‘현타’의 순간이 온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가슴에 와닿는 단어들이 가끔 있는데 나의 경우는 ‘현타’가 그중 하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실 자각의 타임, 뭔가를 강하게 원했던 욕망 충족의 과정에서 찾아오는 무념무상의 시간’이라고 한다. 즉, 내 나라 내 땅의 이름과 역사도 모르면서 남의 나라 지리를 생선 가시 바르듯 파헤치고 있구나 하는 반성의 시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면 달콤한 열매의 시간이 오는 법이다. 아는 만큼 사정을 이해하게 되고, 마셔보고 싶고, 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얼마 전 부르고뉴 코트 도르(Côte-d’Or) 지방의 주브레 샹베르땅(Gevrey-Chambertin) 와인을 마신 적이 있다. 코트 도르는 부르고뉴의 중심부로서, 그중 북쪽을 가리키는 코트 드 뉘(Côte de Nuits) 지역 중 하나인 주브레 샹베르땅 마을의 와인을 마셨다는 말이다. 달랑 ‘부르고뉴’ 만 쓰여있는 와인보다는 고급으로 치지만, 쿨하게 ‘샹베르땅(Chambertin)’ 하나만 쓰여있는 최고급 와인이나, 자세한 포도밭 이름이 붙거나 붙지 않은 그 아래 등급보다는 평범한 축에 속할 것이다. 주브레 샹베르땅 지역의 최고급 와인이 늘 쿨하게 ‘샹베르땅’ 한 단어로만 이루어졌을 거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같은 최고 등급이지만, ‘샹베르땅 클로 드 베즈(Chambertin-Clos de Bèze),’ ‘샤펠 샹베르땅(Chapelle-Chambertin)’ 등의 긴 이름들을 가진 와인이 잔뜩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이거다. 표를 만들고, 지도를 보아 체크를 하며 와인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술맛 떨어지는 일이다. 한국의 도시 이름을 알려면, ‘평창’ 올림픽과, ‘부산’ 국제영화제 또는 ‘전주’ 비빔밥 등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 대한민국 전도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 더 깊이 있는 재미를 얻는 방법인 것과 마찬가지다. 조셉 드루앙(Joseph Drouhin) 이라는 회사가 피노 누아로 만든 주브레 샹베르땅 마을 와인의 깊은 루비색 와인을 마시고 그게 좋았다면, 오늘은 그것만 기억해 두면 된다. 참고로, 영미권에서는 갈색빛이 도는 검붉은 색을 가리켜 ‘버건디(Burgundy)’색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버건디란 프랑스 부르고뉴의 영어식 표현이다. 그런데 부르고뉴의 와인은 대체로 밝은 루비색에 가까운데 어쩌다 보르도 와인과 비슷한 색에 버건디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보르도 사람들은 갈색빛 검붉은 색을 역시나 보르도 색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샹베르땅 와인은 나폴레옹이 즐겨 마신 와인이라고 한다. 그의 제1시종이었던 콩스땅(Constant)이라는 사람이 회고록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가끔 마시는 샴페인 이 외에는 늘 샹베르땅 와인만 마셨다고 한다. 한번 마시면 한 병 반을 마셨다고 하는데, 당시 와인 한 병은 오늘날(75cl)과 달리 50cl였으며, 지중해에 위치한 코르시카 섬 출신답게, 얼음과 함께 마셨다고 하니 생각보다는 덜 취한 상태로 지냈는가 보다.

나폴레옹은 샹베르땅 와인을 너무도 사랑하여 이집트 원정길에도 늘 한 궤짝 씩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와인이 변질되면(당연하게도) 자신을 따르는 군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월급 대신 그의 상한 와인들을 주려는 얄미운 짓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한편 이렇게 순한 술만 마셨던 나폴레옹이지만, 프랑스의 브랜디 꼬냑(Cognac)을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자신은 마시지도 않으면서 꼬냑의 브랜드 쿠르부아지에(Courvoisier)의 셀러를 방문해 독려하고 군대에도 꼬냑을 공급했는데, 이는 위스키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한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음 은 분명한 것 같다.

실속 있는 뷔페 이용을 위한 노하우 앞에서 늘 좌절하다가 만약 전 세계 와인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와인 뷔페를 상상하다 보니, 피노 누아와 부르고뉴, 샹베르땅 까지 나왔다. 먹을 것도 많고 마실 것도 많은 좋은 세상이다. 얼마 전 본 영화가 생각난다. 이리저리 발버둥 치다가 한계를 깨닫고 친구, 가족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며 혜성 충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학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우리 참, 부족한 게 없었어. 그렇지?’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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