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30개월 된 아이도 안다. 서른 달을 사는 동안 이것저것 먹어 보니 당근은 아무래도 자기 입맛에 안 맞는 다든지, 어린이집 등원 패션으로 분홍색(혹은 파란색) 만은 용납이 안된다 하는, ‘이건 정말 못 참겠다’ 싶은 것들 말이다. 차곡차곡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 되는 사람은 오죽할까. 나에게도 견디라면 견디겠지만 이왕이면 피하고 싶은, 남들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참기 힘든 두 가지’라는 것이 있다.

첫째는 불어버린 라면이다. 라면뿐 아니라 국수 형태를 띤 모든 불은 면발이 이에 속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국물이 완벽히 배일만큼 적당히 퍼진 면발을 선호하는 사람들. 덜 익은 면은 밀가루 냄새가 나서 못 먹겠다는 사람들 또는 소화가 잘 된다는 이유로 일부러 오랜 시간을 들여 익혀 먹는 사람들. 슬프게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우리 엄마와 역시 요리에 두각을 보이는 남편의 라면 취향이 그러하다.

그래서 두어 셋이 모인 자리에서 라면을 끓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난감해진다. 라면 두세 개 끓이자고 좁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각자 냄비를 들고 서성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좁은 인간관계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나는 아무래도 소수에 속하는 듯하다. 그들 말로는 내가 끓인 게 덜 익어도 한참 덜 익었다고 하니 이쯤 되면 내가 국수 요리를 먹을 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도 같다. 아무튼 그렇다고 내 분량은 조금 일찍 꺼내서 불지 않도록 먼저 먹는다거나 혼자 따로 끓인 다거나 하는 것도 참 어지간히 까탈스러워 보여 대개는 남들과 함께 먹곤 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적당히 익은 라면이란, 아, 그것은 이미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은 라면은 여름 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름에는 도저히 우아할 수가 없다. 다른 계절에는 우아한 사람이었냐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부딪히는 판단의 순간에서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갖고 차분한 결정을 내리기가 정말 힘들다. 그래서 별것도 아닌 일의 화를 내고 충분히 너그러울 수 있는 상황에서 옹졸한 태도를 보이는 실수를 하곤 하는데, 너무 더위를 먹으면 급기야 정 줄 놓은 사람처럼 사고가 정지된다.

더위에는 말 그대로 치장이란 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몸을 가볍게 하고 통풍이 잘 되는 옷이 최고다. 외모를 1.5배 돋보이게 한다는 소문이 있는 귀걸이도 싫고, 옷에 달린 쓸데없는 레이스나 칼라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집 안엔 물건이 많을수록 덥게 느껴지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버리거나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운다. 사람도 집도 모든 게 간소화된다.

일기 예보를 볼 필요도 없이 일주일 내내 37도가 계속되는 7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루 종일 가동 중인 에어컨 때문에 냉방병에 걸려 끊임없는 콧물과 재채기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던 중, 그날은 마침 한참을 걸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에어컨 바람만은 당분간 피하고 싶어서 오랜만의 야외 활동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는데 뜨거운 햇볕이 병든 내 몸을 깨끗이 소독(?) 해 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걷기가 10분이 넘고 20분이 넘으니 마치 태양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어디 한번 죽어봐라’ 하는 심산으로 나를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게 열 돔 현상 때문이라면, 대기권을 뚫고 위로 솟아버리면 분명 이 불구덩이 같은 더위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초능력이 있다면 능히 이 지구를 벗어나겠구나, 반쯤 혼이 나간 상상을 하다가 무사히 기절하지 않고 실내에 도착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편에 비해 그다지 땀을 흘리지 않지만, 의자에 앉는 순간 홍수처럼 솟아나는 땀부터 닦아야 했다. 요즘은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게 문제다. 한 손으로 마스크를 살짝 잡아당기고 티슈를 든 다른 한 손은 마스크 밑으로 집어넣어 땀으로 초토화된 얼굴을 주섬주섬 문질러 닦는데 휴지 몇 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해를 가리던 모자를 벗으니 이마에 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쩍쩍 들러붙어 있다. 역시 여름에는 우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여름이 오면 가벼워진 옷차림만큼이나 에너지가 샘솟고 유달리 활기를 띠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여름은 잎이 무성하게 자란 수풀처럼 싱그러운 계절이고, 수박의 계절이며 한 해의 절정 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노래를 잘 해 어느 자리에서든 주인공이 되는 사람 다음으로 늘 부러워하곤 했다. 왜 하필 나는 더위에 약한 체질로 태어난 걸까. 엄마가 말씀하시길, 내가 한국에 없던 2018년의 폭염은 올해보다 더 했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청량한 여름 밤을 기대하며 캐주얼 하게 마실 와인으로 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 아이스 카바(Cava)를 준비했다. 이미 충분히 차가운 데도 잔에 따르니 금세 미지근해진다. 아예 얼음 몇 개를 들이부었지만 너무 더위를 먹은 걸까.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와인을 마실 때 ‘목을 축인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도 기온이 어느 정도껏 일 때 이야기 인가 보다. 너무 더울 때는 차갑게 식힌 보리차 만한 게 없다. 목을 축이는 데 있어서 커피나 와인은, 물과 식힌 보리차 앞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도 지나고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분다. 비로소 차분한 사고가 가능해지고, 잊고 있던 미각의 세계도 돌아오는 걸까. 진한 믹스 커피도 한번 타 마시고, 뜨겁게 내린 원두커피의 모락모락 올라오는 향에 얼굴을 갖다 대 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을을 맞이하는 첫 와인으로 말벡(Malbec)을 마시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직이다. 진한 보라색이 주는 인상과 달리, 말벡에는 복잡하지 않은 과일 향의 소박함과 부드러움이 있다. 힘든 여름을 보내고 나서의 첫 레드와인으로 어쩐지 적당해 보인다.

유난히 더위에 약한 나에게, 갈수록 더워지는 여름은 ‘와인이 덜 생각나는 시기’가 될 것인가? 사실 도시에 살면서 덥다고 와인을 마시고 안 마시고는 그냥 내 개인적인 일일뿐이다. 그러나 이 기후 변화란 것은, 세상 어느 과일보다도 섬세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포도 농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올해 보르도는 다행히 너무 덥지 않아 전통적인 9월 수확이 가능 했지만 이제는 8월에 시작하는 포도 수확도 드문 일이 아니다. 50년 동안 수확 날짜는 1개월이 앞당겨졌다.

평균 기온이 오르면서 포도 산 지도 자연히 극지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영국은 물론이고 이제는 북유럽에서도 포도를 재배하기에 이른 반면에 전통적인 와인 산지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이 크다. 미국 국립 과학원 회보(PNAS)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온이 2도 높아질 때마다 포도 재배지는 50% 이상 사라질 것이고, 4도 이상 오른다면 그 면적은 약 80%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와인 농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저 포도 품종을 바꾸는 것뿐이다. 즉 더위와 가뭄에 잘 견디는 품종으로 말이다. 피노 누아 산지인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과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의 고장인 보르도는 모두, 무르베드르(Mourvedre) 즉 더운 지방에서 블렌딩 용으로 많이 쓰이는 품종을 재배하는 지역으로 탈바꿈 되고, 산미가 중요한 소비뇽 블랑과 피노 누아의 재배지는 점점 추운 지방으로 이동할 것이다. 프랑스 남부 랑그독(Languedoc) 지방에서는 이미 늦게 여물고, 가뭄에 강한 그리스와 이탈리아 품종들을 실험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마실 와인은 점점 농익고, 알코올 농도가 더 높으며 덜 섬세할 것이다. 그럼 이미 뜨거운 날씨에 견디는 품종에 한정된 포도 농사를 하고 있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호주 등은 무얼 선택해야 할까?

▲ 4월의 포도밭. 프랑스 생떼밀리옹 <사진=송정하>

숨 쉬고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하는 것은 포도뿐이 아니다. 그깟 와인, 안 마시고 살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다. 과학자들은, 50년 안에 더워서 살 수 없는 땅이 현재 1%에서 19%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인간도 더위와 재해, 그로 인한 가난과 불평등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는, 기후 난민의 문제에 맞닥뜨린 것이다. 생물학자이자 세계적인 문화 인류학자이며 <총, 균, 쇠>의 저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문명은 이제 30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무섭지만 아직도 가슴에는 와닿지 않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두고 볼 일이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 <귀천(歸天)>에서, 하늘로 돌아가는 날, 다시 말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고 했다. 그에게 삶은 소풍이었나 보다. 이 땅의 단 한 줌도 영원히 내 것일 수 없는 이곳에서 소풍 나온 나비처럼 훨훨 날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나 하나 먹고사는데 뭐가 그리 많은 게 필요했는지, 오늘도 버리고 분리해야 할 쓰레기가 베란다에 한가득이다. 너무 더워 일에 능률이 오르지 않으니 에어컨을 켜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을 소풍 온 것처럼 제대로 놀아 보려면 해외여행도 가야 하고, 비행기도 타야 한다. 내 자식과 그 자식의 자식도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터전이지만 내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내가 배출하는 이산화 탄소가 얼마나 되는지, 그로 인해 지구는 또 얼마나 뜨거워질지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다.

그러니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와인 애호가의 자세 같은 것도 있을 리 없다.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오늘 마실 와인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마실 수 있는 것들을 감사히 여기고 즐길 뿐이다. 그리고 가까운 훗날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은 모를, 내가 누렸던 즐거움을 지루한 옛날이야기처럼 늘어놓는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란다. ‘나 때는 와인이 이렇게 진하지 않았지. 아찔한 신맛이 인상적인 샤블리 와인 이란 것이 있었지. 참 좋았던 때지… ’라고 말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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