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라, 지금은
모든 것을 불신해도 좋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하지만 시간을 믿으라, 지금까지 시간이 너를
모든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았는가
개인적인 일들에 다시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니,
너의 머리카락에도,
고통에도 흥미를 갖게 될 것이니,
계절이 지나서 핀 꽃이 다시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쓰던 장갑이 다시 정겨워질 것이다
장갑으로 하여금 다른 손을 찾게 만드는 것은
그 장갑이 가진 기억들
연인들의 외로움도 그와 같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빚어 내는
거대한 공허감은
채워지기를 원하니,
새로운 사랑에 대한 갈망이
오히려 옛사랑에 충실한 것

기다려라
너무 일찍 떠나려 하지 말라
너는 지쳤다, 하지만 모두가 지쳤다
하지만 누구도 완전히 지치진 않았다
다만 잠시 기다리며 들어 보라
머리카락에 깃든 음악을
고통 안에 숨 쉬는 음악을
우리의 모든 사랑을 다시 엮는 베틀의 음악을
거기 있으면서 들어 보라
지금이 무엇보다도 너의 온 존재에서 울려나오는
피리 소리를 들을 유일한 순간이니,
슬픔으로 연습하고,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연주하는 음악을

- 골웨이 키넬 <기다려라>

태초에 신은 시간을 만들지 않았는데
인간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불신으로 가득차 있을때에는
시간의 힘을 믿을 일 입니다.
환경오염과 바이러스로 모든것이 혼돈속에 빠져있을때는 차리리 외롭게 침잠(沈潛) 하여 시간의 힘을 기다릴 일 입니다.

"신은 천둥 벼락 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신은 빗방울 같은 모습으로 온다"

천둥 벼락을 피해 빗방울 속으로 들어가 있을 때
다시 만난 사람이 카잔차키스의 조르바입니다.
한 문장도 그냥 넘길수가 없어서 자근자근 씹어먹듯이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수평선 너머를 동경하며 살아갑니다.

유년시절을 보낸 바닷가에 석양이 내리기 시작하면 뱃사람들은 석양너머로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아침이면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항구로 돌아오곤 했지요.
어렸던 나는 석양너머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떠났나 봅니다.
그  수평선 너머  어디즈음에서 조르바를 만났습니다. 책속의 화자가 조르바를 만난 곳은 크레타 섬으로 가는 항구의 카페입니다.

위험에 처한 고국 그리이스 동포를 구하러 가는 친구는 '나'에게 이런 인사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잘 가게 이 책벌레야"

나(니코스 카잔차스키)는 전형적인 책상물림 지식인 입니다.
관념과 머리로만 살아왔던 '나' 에게 던지고 간 화두였습니다.

조르바는 기분이 좋으면 춤을 춥니다.
말보다는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언어로는 표현이 안되는 거지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할 수 없는것에 침묵했고, 조르바는 춤을 추었습니다.

조르바는 육체에 피가 돌고 머리에 저울을 달고 이해하려고 들지 않은 사람입니다.
대지와의 탯줄이 아직 끊이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극단적인 두 사람을 이어주는것은 항상 와인이었습니다.
크레타의 레드와인이었지요.
음식과 와인을  나누는 일은 육체의 공복이 아니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일 입니다.

"늙은 가지에 새 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지요. 그리고 거기 처음에 달리는 건 쓰디쓴 열매뿐이지요. 이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열매를 익히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되지요. 이게 포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 포도를 짓이겨, 우리가 술고래 성요한의 날에 열어 보면, 아! 포도주가 되어 있지 뭡니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조르바가 와인을 우리의 삶에 비유해 설명하는 구절 입니다.
포도 열매가 자연 상태에서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 변화인 반면, 포도즙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화학적 변화입니다.
작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포도주가 사랑이 되는 과정을 ‘메토이소노’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臨界)상태를 넘어 정신적으로 성(聖)스럽게 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이 장면은 와인이 우리의 삶에 줄 수 있는 의미와 관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와인이 인류에게 존재한 기록인 7000년 전 부터 이 시간까지 와인은 우리에게 신에게 가까이 가는 매개체로, 혹은 수많은 문화와 철학적 연관성을 가지고 인류와 함께해 왔습니다.

와인문화는 유목생활을 했던 우리의 조상들의 삶을 정착하게 했으며, 문명의 시대로 이끌어 주었던 원동력이였습니다. 포도열매가 으깨어지고 나면 죽음을 맞이하지만, 발효과정의 요묘함으로 그것을 부활하게 하였습디다.

그 과정은 고대인들에게 경외심을 가지게 했으며, 상징과 은유로서 기독교와 유태교예식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조르바와 나(화자)는 염소피같은 와인을 수시로 나눕니다.
크레타는 원래 Malmsey라는 달콤한 와인이 유명했던 곳 입니다.
그리스 와인 생산량의 약 1/5을 차지하는 이곳은 주로 화이트와인 생산지 입니다.
침체 되었던 크레타의 와인산업은 최근에 들어서 프랑스 론 품종 등 다양한 와인품종들이 식재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 염소피 처럼 검붉은 크레타의 레드와인

조르바와 마셨던 염소피같은 와인은 십중팔구  대표적인 레드품종인 kotsifali나 Mandilaia로 만든 와인일 것 입니다.

kotsifali는 알콜함량이 높고 상쾌한 과실향, 낮은 산도와 부드러운 붉은색을 가진 품종입니다. Mandilaia는 깊고 생동감있는 색과 높은 산도, 강한 탄닌을 가진 품종입니다.

"나는 또 한 번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소리 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달았다.
필요한 건 그뿐이였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 뿐이다."

포도주 한잔,
밤 한톨,
바람소리,
소박한 마음은 질과 양의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조르바는 온 몸이 촉수인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사람 이였습니다.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미각의 돌기를 예민하게 세우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감과 소박한 마음으로 느낄수 있는 행복은 삶과 와인이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벌써 올해의 마지막입니다.
시간은 너무 빨리 우리앞을 지나칩니다.
시간은 가고 유한하기에 우리는,
더 깊이 살아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에게 선물한 시간만이
온전한 자기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야,
전혀 야망이 없되 말처럼 열심히 일하는 거지,
마치 모든 야망을 가진 것처럼.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되, 그들을 필요하지 않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것.
당신의 위로는 별들을, 좌로는 흙을, 그리고 우로는 바다를 두고 문득 당신의 마음 속에 인생이 최후의 기적을 완성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
바로 인생이 동화가 되었다는 것을. "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中

그리스인이면서도 크레타인으로 불리길 원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조르바를 이렇게 추억합니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이제 크레타섬으로 가는 항구에 서 있습니다.

날 데려가시겠소? 조르바 !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