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아는 분께 와인 한 병을 추천한 적이 있다. 와인을 마셔 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그분에게 나는,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지방의 프리미티보(Pimitivo:진판델의 다른 이름) 품종의 와인을 소개했었다. 과일의 달콤하고 화려한 향과 떫은맛이 거의 안 느껴져 입안에서 느껴지는 실크 같은 감촉이 와인을 처음 접해 보는 사람도 무난하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만 원 대의 그리 비싸다고는 할 수 없는 와인을 손에 든 그녀는 좋은 날, 날 잡아서 마실 거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러 다시 만난 그녀에게 나는 그때 그 와인이 어땠는지, 잘 드셨는지 물었고,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 이번엔 꼭 마시려고요. 마실 새가 있었어야 말이지, 하하!’’

그녀의 대답에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와인은 특별한 날에 마시거나 최소한 스테이크 한 접시, 혹은 이국적인 치즈라도 한 조각 있어야 즐길 수 있는 술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물론 여느 한국인처럼 새벽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사는 그녀에게는 위험할 정도로 늘씬한 와인 잔을 꺼내는 일부터가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와인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여유가 없는 것도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와인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어느 때나 - 심지어 점심에도(물론 적당히!) - 마실 수 있는 일상의 음료라고 치자. 그럼 와인은 정말 뭐랑 마시면 좋을까? 사실 이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논의는 대학의 전공 책만큼이나 두꺼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처럼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의 음식을 다 만들고 사 먹을 수 있는 시대에, 각 나라의 모든 음식을 고려한다면 그 이야기는 더 방대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결론은 늘 매한가지다. 음식과 와인의 조합은 결국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 도대체 무슨 음식과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정답은 없지만 분명 힌트는 존재한다. <사진=송정하>

문제는 나의 취향을 아직 모르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음식과 와인 속에서 그만큼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다 경험해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매 끼니마다 콜라를 함께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다행히도 맛의 조화와 균형에 있어서 우리의 입맛은 비슷한 것 같다. 그렇기에 이미 전문가들이 많은 경험과 연구를 통해 확립한 음식과 와인의 조합에 대한 최소한의 법칙을 알아 둔다면, 올겨울 기름지고 살이 단단한 동해 산 대방어회에 버섯과 가죽 등 복합적인 향이 가득한 풀 바디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참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공통의 법칙

이는 음식과 와인 페어링의 기본이 되는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음식과 와인이 지닌 공통된 맛과 향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맛이 극대화되고 나아가 새로운 맛과 향을 창조한다는 법칙이다. 한마디로 서로 비슷한 풍미의 와인과 음식을 매칭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운 후추 등의 향신료 향이 나는 시라(Syrah) 품종의 와인을 역시 매콤한 한국의 음식들과 함께 마시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은 서로가 지닌 공통의 느낌과 맛의 강도를 고려하는 것이 핵심이다. 즉 가볍고 단순한 음식에는 가벼운 타입의 와인을, 섬세한 맛이 나는 음식은 섬세한 풍미가 있는 와인, 그리고 진하고 농후한 맛의 음식은 역시 무거운 타입의 와인을 매칭하여 어느 한 쪽의 맛과 향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신선한 샐러드나 레몬을 곁들인 생굴을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이나, 리슬링(Riesling), 상큼한 샤르도네(Chardonnay) 등 가벼운 타입의 화이트 와인과 마시면 입안에서 샐러드나 생굴의 신선함이 그대로 살아난다.

공통의 법칙은 맛의 강도뿐 아니라 함께 하는 음식의 색에도 적용된다. 요리의 색이 옅으면 화이트 와인, 붉은색 등 진한 색에 가까우면 레드 와인을 마시는 식이다. 이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에서도 조화롭고 비슷한 색이기 때문에 테이블에 함께 내놓을 때 보기에도 좋다. 예를 들어 파스타를 먹는다고 가정해 보자. 카르보나라 파스타는 흰색에 가깝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을 함께 하는데 치즈의 크리미한 소스와 만나도 지지 않는 살짝 무거운 타입의 샤르도네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만약 토마토 파스타를 먹는다면 토마토의 새콤한 맛을 살려주는 레드 와인을 함께 마시면 좋다. 산도가 높은 산지오베제(Sangiovese) 와인을 곁들이면 아주 잘 어울릴 것이다.

이 법칙은 달콤한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달달한 와인과 함께 마시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 조합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가뜩이나 단 음식에 왜 또 단 와인을 곁들이는지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단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드라이한 와인을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마시면 와인의 시고 씁쓸한 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콜릿 케이크에 달콤한 과일향이 가득한 진판델 등의 드라이한 레드 와인을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는 아직도 이 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비되는 조합

이 조합은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치킨을 맥주와 함께 마시는 원리와 같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양념한 치킨의 풍미를 즐기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 살짝 기름진 입안이 개운하게 헹궈지는 느낌이다. 만약 와인을 마신다면 산도가 높은 소비뇽 블랑이나 샤르도네 등의 산뜻한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릴 것이다. 한편 매운맛이 익숙하지 않은 서양인들은 매운 음식을 먹으며 달콤한 와인을 찾는다. 입에 난 불을 꺼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맛의 균형을 대비되는 조합을 통해 찾는 원리이다.

서로 같은 지역의 음식과 와인

보르도 사람들은 레드 와인을 넣어 졸여 만든 보르도식 장어 요리를 보르도 생떼밀리옹 지역의 부드럽고 향긋한 레드 와인과 함께 마신다. 그리고 돼지고기 요리가 유명한 알자스 지방의 음식에는 역시 그 지방의 산도 높은 리슬링 와인을 매칭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렇듯 같은 지방의 음식과 와인을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꽤 편리하고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와인은 그 지방의 음식의 맛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한 탁월한 조합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치즈나 토마토가 풍부한 이탈리아 음식을 먹는다면 타닌이 적당하며 식재료의 맛을 살려주는 산도 높은 이탈리아 레드 와인을 함께 마시면 좋다.

붉은 고기에는 레드 와인, 생선에는 화이트 와인?

나는 위 공식에 대해 일단 ‘예스’라고 말하고 싶다. 붉은 고기의 풍부한 단백질은 강한 타닌을 부드럽게 해 주며 감칠맛이 강한 고기의 육즙은 레드 와인의 진한 과일 맛과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와인의 타닌이 생선 기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어려운 분석은 차치하고라도, 와인과 음식의 맛의 강도를 고려해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는 균형의 법칙을 생각하면 이 공식이 고리타분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와인 페어링에 있어서 와인이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과 무게감이 와인의 색과 향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위 공식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선한 생선이나 해산물 요리에 지나치게 무거운 타입의 화이트 와인을 함께 하는 것보다는 보졸레(Beaujolais) 지방의 와인처럼 산도 높은 레드 와인을 시원하게 해서 마시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

만능 와인, 로제와 스파클링

로제 와인은 색이 보여주듯이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의 경계에 있다. 즉 다양한 농도의 색이 주는 맛의 풍부함과 화이트 와인과 같은 은은한 향의 깔끔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과 스파이시한 맛이 강한 우리 음식과 함께 마시면 요리가 더욱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특유의 기포가 매력적인 스파클링 와인은 드라이한 경우, 대부분의 음식과 잘 어울려 식사 내내 마시기에 좋다. 산뜻한 산도가 식욕을 돋우고 다양한 음식을 먹은 후의 입안을 개운하게 마무리해 준다.

이제 대강의 법칙을 알았으니 이것을 참고로 이것저것 시도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다 보면 ‘오오 과연!’ 혹은 ‘에이, 이건 영 아닌데?’ 싶은 음식과 와인의 조합을 발견하는 능력 즉 일종의 직감이 생긴다. 그러면서 또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식의 법칙으로는 어떻게 설명하기 힘든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보드카를 원샷 한 후 생마늘을 씹는 러시아의 상남자들이나 매운탕에 소주를 즐겨 마시는 우리처럼 말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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