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맘먹고 산 샴페인인데, 빈티지가 쓰여있지 않다. <사진= 김지선>

와인 병 라벨에는 포도가 생산된 해인 빈티지가 적혀 있다. 와인샵에 들어서면 가장 최근 빈티지인 2017년을 포함한 2010년대의 빈티지의 와인이 많이 보이며, 철저하게 온도가 조절되는 고급 와인 칸에는 1980년대, 심지어 1960년대 빈티지가 적힌 와인도 있다.

그러나 유난히 샴페인에는 빈티지가 적힌 병을 만나기 쉽지 않다. 빈티지가 적혀있어야 할 자리에는 브뤼(Brut) 혹은 그랑 크뤼(Grand Cru) 같은 말들이 쓰여 있다. 빈티지에 따라 와인의 맛도, 가격도 천차만별인데 왜 샴페인 병에는 빈티지가 쓰여 있지 않을까?

그 이유는 '샴페인은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혼합하여 만들기 때문'이다.

▲ 빈티지 샴페인도 존재한다. 이들은 보통 하우스의 최고급 샴페인의 자리를 차지한다. <사진= 김지선>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밝혀둬야겠다. 빈티지 샴페인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넌빈티지 샴페인보다 생산량이 월등히 적고, 가격대도 더 높다. 와인에 깊게 빠질수록 빈티지 샴페인을 찾게 되지만 샴페인의 핵심 철학은 뭐니 뭐니해도 이 '넌빈티지' 샴페인에 있다.

프랑스에서는 오직 샴페인에 한해서만 생산연도가 다른 와인을 섞어 만드는 일이 허용된다. 포도 품종이나 생산된 포도밭 등이 다른 와인을 섞는 것을 프랑스어로 아상블라주(assemblage)라고 하는데, 빈티지를 섞는 샴페인용 아상블라주는 19세기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다. 샹파뉴는 서늘한 지역이라 예전부터 산도가 높은 와인을 만들었다. 특유의 산미와 신선함으로 귀족의 사랑을 받았으나, 기후의 편차가 커 해마다 수확한 포도의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고자 와인 생산자들은 작황이 좋은 해의 와인을 조금씩 저장하기 시작했다(이를 리저브 와인reserve wine이라고 부른다). 이 리저브 와인은 하우스에 따라 스테인리스 스틸 통이나 오크통, 심지어는 매그넘 사이즈의 샴페인 병에 보관했다. 그리고는 작황이 좋지 않거나 기후의 특징이 다른 해의 와인과 이 저장해놓은 와인들을 섞어 샴페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모아 만들다 보니 품질의 편차가 적은 샴페인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 아상블라주의 극치를 보여주는 크룩 그랑 퀴베 <사진= 김지선>

샴페인 하우스마다 사용하는 리저브 와인의 개수는 천차만별이나, 보통 50개에서 200개 정도가 사용된다. 하우스의 규모가 클수록 여력이 있어 더 많은 리저브 와인을 보유할 수 있다. 아상블라주를 중시하는 대표적인 샴페인 하우스인 크룩은 매년 생산하는 넌빈티지 샴페인 그랑 퀴베를 만드는 데에 150개의 리저브 와인을 사용하고 있다. 개인 생산자(RM)들은 이보다 적은 수의 리저브 와인을 사용하는데, 에릭 로데즈(Eric Rodez)와 아르노드 마르게인(Arnaud Margaine)은 RM임에도 유난히 많은 리저브 와인을 사용하는 생산자로 알려져 있다. 매년 에릭 로데즈는 넌빈티지 샴페인을 만들 때 십여 가지의 리저브 와인을 무려 45%에서 50%까지 포함한다.

아상블라주의 진가는 빈티지의 극복에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해의 와인들이 만나는 순간, 이 조합은 각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단순한 합 이상의 조화를 드러낸다. 여러 개인으로 이루어진 팀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1+1=2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과 같다. 이러한 조합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셰프 드 카브(Chef de Cave) 또는 셀라 마스터(Cellar Master)라고 불린다. 셰프 드 카브를 선두로 한 팀원들은 매년 새로 만든 와인과 리저브 와인을 하나하나 맛보며 최상의 혼합 비율을 찾아낸다. 이렇게 태어난 넌빈티지 샴페인은 각각 따로 존재할 때보다 숙성력과 맛의 복합성, 조화로움이 상승하게 된다.

▲ 볼랭저 내에 있는 오크통 수리 공간 <사진= 김지선>

마지막으로 아상블라주는 샴페인 하우스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기후뿐 아니라 포도밭의 위치, 지형, 토양의 종류, 효모의 종류나 양조 방법 등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그러나 한 하우스의 리저브 와인들은 하우스만의 재배나 양조방법에 따라 만들어지므로, 단일 리저브 와인 여럿이 모이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이 더 두드러지게 된다. 예를 들어 폴 로저는 오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포도의 순수한 풍미를 강조하는 편이고, 반대로 볼랭저는 와인을 발효할 때부터 오크통을 사용하여 미세한 산화를 통한 복합미와 숙성력을 강조한다.

▲ 조화의 철학이 담긴 넌빈티지 샴페인을 추천한다. <사진= 김지선>

이제는 예전만큼 춥지 않고 기술도 발달하여 대부분의 생산자가 빈티지 샴페인을 출시하고 있다. 심지어는 단일 빈티지에 단일 밭에서 나온 하나의 포도 품종만으로 샴페인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샴페인을 만드는 곳은 아주 극소수고 그나마도 아주 뛰어난 해에만 생산되지만, 이런 프리미엄 샴페인의 등장으로 인해 넌빈티지 샴페인은 '편하게 마시기 좋은' 샴페인이 되었다. 가격은 낮을지언정(물론 전체 스파클링 와인에서는 비싼 편에 속한다) 그 안에 담긴 '조화로움'의 가치만큼은 낮지 않다. 넌빈티지 샴페인을 합주에, 빈티지 샴페인을 독주에 비유하던 크룩 솔라씨의 말이 떠오른다. 솔로와 오케스트라. 취향에 따른 선택은 자유지만, 샴페인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면 최상의 아상블라주로 탄생한 넌빈티지 샴페인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김지선 칼럼니스트는 영국 와인 전문가 교육 WSET Advanced 과정을 수료후 WSET Diploma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아무리 마셔도 끝이 없는 와인의 세계에 빠져 와인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으며, 전 국민이 와인의 참맛을 아는 날이 오도록 힘쓰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김지선 j.kim@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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