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프랑스 와인에 열광했던 1970년대 당시 와인 신생국이었던 미국의 와인이 프랑스의 국가 대표급 와인을 이긴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리의 심판'입니다. 저명한 프랑스 와인 전문가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평가한 결과였기에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말했습니다. “파리의 심판은 프랑스 와인이 우월하다는 신화를 깨고 와인 세계의 평준화를 이루었다. 이는 와인 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고 말이죠.

이렇듯 미국 와인을 단번에 세계 유명 와인들과 같은 대열에 설 수 있게 해준 '파리의 심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파리의 심판'의 시작은 한 영국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합니다. 파리에서 와인바이어로 일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 그리고 그의 미국인 직원 패트리샤 갤러허(Patricia Gallagher)는 그들이 운영하던 와인숍과 와인스쿨 '아카데미 뒤 뱅'을 홍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독립 200주년을 맞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신생 와이너리들의 와인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이벤트를 기획합니다.

그들이 기획한 시음회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각각 10종씩을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 순위를 결정하는 행사였고, 이를 위해 9명의 프랑스의 와인 전문가들을 심사위원으로 참여케 합니다. 심사위원은 로마네 콩티의 공동소유자 오베르드 빌렌, 보르도 그랑 크뤼 샤또들의 연합체인 UGC 사무총장 피에트 타리, 프랑스 최고의 와인 전문지 르뷔드 뱅 드 프랑스의 편집장 오데뜨 칸 등 당시 와인계의 기라성 같은 유명인들이었죠.

▲ 파리의 심판 심사위원들 <사진=나라셀라>

오전에는 화이트 와인, 오후에는 레드 와인 세션으로 시음을 진행하였고 화이트와 레드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6종, 프랑스 와인이 4종이었습니다.

어떤 심사위원도 미국 와인이 승리할 거라는 예상을 하지 않습니다. 시음회에 선보인 미국의 신생 와이너리가 만든 와인 품질에 대한 믿음이 없었고, 그때의 미국 와인 대부분이 테이블 와인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캘리포니아 와인과 함께 테이스팅 했던 프랑스 와인들은 화이트는 부르고뉴 생산자의 그랑 크뤼와 1등급이었고, 레드 와인도 보르도 그랑 크뤼 1, 2등급의 최고급 와인이었습니다.

▲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Chateau Montelena Chardonnay) <사진=나라셀라>

하지만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오전 화이트 와인 세션에서 여유롭게 옆 사람과 몇 마디씩 주고받으며 진행되던 시음은 결과가 발표된 후 급격히 심각해졌습니다. 만만하게 봤던 미국 와인인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이 총점 132점으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126.5점으로 2위를 차지했던 프랑스 와인 '도멘 룰로 뫼르소 1등급 샴 1973’을 점수로도 압도했으며, 상위 5위 내에서도 다른 캘리포니아 와인의 이름이 2개나 더 있었습니다.

오전 화이트 와인 시음 결과에 당황한 심사위원들은 오후 레드 와인 세션에서는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 없이 테이스팅에만 집중합니다. 오전의 오판은 해프닝에 불과했으니 보르도스러울 수 없다고 믿었던 캘리포니아 와인을 꼭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시음장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레드 와인도 역시 미국의 스택스 립 와인 셀라 카버네 소비뇽 1973이 1위로 발표됩니다. 2~4위를 차지한 와인은 샤또 무똥 로칠드, 샤또 몽로즈, 샤또 오브리옹이었습니다. 모든 심사위원들의 웃음기는 사라졌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르뷔 뒤 뱅 드 프랑스'지의 편집장 오데뜨 칸은 자신의 채점표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 스택스 립 와인 셀라스 S.L.V 카버네 소비뇽(Stag's Leap Wine Cellars S.L.V. Cabernet Sauvignon) <사진=나라셀라>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시음회의 모든 과정을 목격한 '타임(Time)'지의 파리 특파원 죠지 테이버(George Taber)의 기사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특별한 취재 일정이 없어 이 시음회에 왔던 그는 인생 최대의 특종을 낚으며 전 세계 와인계의 판도를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시음회 2주 후 타임지에 대서 특필된 이 사건은 ‘파리의 심판', '파리 테이스팅'으로 불리며 세계 와인 시장이 캘리포니아 와인을 주목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영향력은 한국에서도 대단합니다.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을 차지한 샤또 몬텔레나 샤도네이와 지금은 스택스 립 와인 셀라 SLV 카버네 소비뇽으로 이름을 바꾼 당시 우승 와인은 매해 수입량이 동이 날 정도로 인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파리의 심판’을 기억하며 샤또 몬텔레나와 스택스 립 와인 셀라의 와인을 만나보시는 것은 어떠실까요?

소믈리에타임즈 신성호 칼럼니스트 altoman@naracell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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