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의 와인 관련 블로그를 보면 스페인 와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목적으로 흔히 비노 데 빠고 – VdP (Vino de Pago), 디노미나씨온 데 오리헨 – D.O. (Denominación de Origen), 디노미나씨온 데 오리헨 깔리피까다 – D.O.Ca (Denominación de Origen Calificada), 그리고 비노 데 라 띠에라 – VdT (Vino de la Tierra)등 와인의 원산지 등급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읽어 본 글의 대다수에서 원산지 등급의 우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포함된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 필자는 그런 오해와 편견이 정설로 굳어질 것이 우려되어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이 글을 통해 원산지 등급에 대한 스페인 현지 와인 업계 사람들의 이해를 전하고자 한다.

VdP (Vino de Pago) – 비노 데 빠고란, 영미권의 싱글 이스테이트 와인(Single-Estate Wine)과 동일한 개념으로 국지적인 기후와 토양의 특성, 양조 기법 등으로 인해 와이너리가 위치한 영역 자체를 독립적인 와인 산지로 인정해 고유한 품질과 생산 관리 능력을 등급화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 실질적으로 2003년 스페인 정부가 주도해 제정한 등급이지만, 해당 등급이 본래의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D.O.Ca 보다 상위에 있는 와인 등급처럼 지정되면서 논란의 불씨가 시작되었다. 왜냐면 일반적인 와인 심사 기준으로 VdP에 속하는 와인들이 진정 스페인 최고의 와인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웬만한 D.O. 등급에서 VdP 등급의 와인보다 좋은 와인이 훨씬 많이 생산되고 있다.

▲ 왼쪽부터 베가 시실리아의 우니꼬, 핑구스의 핑구스, 알바로 팔라씨오스의 레르미따 <사진 =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

대표적인 예로, 스페인 와인의 명성과 자존심을 이끌어 온 베가 시실리아(Vega Sicilia), 핑구스(Dominio de Pingus)는 리베라 델 두에로(D.O. Ribera del Duero)를 기반으로 와인을 생산하며, 알바로 팔라씨오스(Alvaro Palacios)의 레르미따(L’Ermita) 는 프리오랏(D.O.Ca Priorat)을 기반으로 하는 등 모두 일반 D.O. 또는 D.O.Ca 등급에 속한 와인들이다. 특히 베가 시실리아와 핑구스의 경우 실질적으로 비노 데 빠고에 해당하지만 VdP 등급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외에도 각종 시음 평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와이너리는 대부분 일반 D.O. 또는 D.O.Ca 등급의 와인들이며, 오히려 VdP 등급 와이너리가 14개 밖에 안 되는 상황임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VdP 등급은 스페인 현지에서 유통되는 가격 면에서도 최고 등급이 아닌 중급 ~ 중상급 정도 대우를 받고 있는 수준이다.

게다가 VdP로 지정된 와이너리의 지역들이 나바라(Navara), 까스띠야 라 만차(Castilla La Mancha), 발렌시아(Valencia) 등지에 몰려 있는 상황은 상대적으로 고급 와인 산지로 명성을 쌓지 못한 지역에 속한 일부 와이너리들이 마케팅을 목적으로 비정상적인 등급 체계를 만들었다는 논란이 된 배경이다. 더군다나 2003년 VdP 관련 법령 제정시 VdP 등급으로 지정된 와이너리가 아닌 경우, 새롭게 설립되는 와이너리들은 이름에 빠고(Pago)를 쓰지 못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또한, 와이너리를 선정하는 절차에 지나치게 주관적인 평가가 많이 개입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VdP에 속한 와이너리 일가가 스페인 왕족이나 정치인과 친분이 두터워 정치적인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다.

그러면 D.O. 와 D.O.Ca, 비노 데라 띠에라 (VdT - Vino de la Tierra)는 어떨까? 이 세가지 등급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D.O.Ca의 와인이 D.O. 등급의 와인보다 좋은 와인일까? 어떤 와인 블로거의 말처럼 VdT 등급은 D.O. 요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추천할 필요도 없는 정도일까?

▲ 리오하 양조협회 홈페이지에 명시된 품질관리 관련 규정 항목들 <사진 = es.riojawine.com>

D.O.와 D.O.Ca 의 관리 규정은 각 와인 산지마다 그에 맞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포도 품종, 재배, 수확량, 양조 과정, 숙성 관리 등에 대한 요건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리오하(D.O.Ca Rioja) 산으로 인정받으려면, 어느 지역 범위 안에서 어떤 포도 품종으로 헥타아르 당 수확량을 얼마 미만으로 해야 하고, 양조 과정에서 어떤 관리를 해야 하며, 숙성 단계에 따라서 어떻게 불릴 수 있다를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D.O.Ca에서 좀 더 세밀하게 관리되기 때문에 D.O. 보다 상위 등급으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람으로 치자면 얼마나 철저하게 정규 교육과정을 수료했는가로 견주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신규 채용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과정을 꾸준히 잘 밟아 온, 소위 말해 학벌이 좋은 사람이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사 과정의 편의를 위한 가정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한 사람의 매력이나 능력이 가방끈의 길이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다는 것을.

그래서 일부 와인 메이커들은 자신이 찾아낸 해당 품종과 그 떼루아에 가장 적합한 와인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기 위해 D.O. 인정 요건을 포기하고 VdT 등급의 와인을 생산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페인 와인의 거장 마리아노 가르시아(Mariano Garcia)가 이끄는 마우로 (Bodegas Mauro)이다.

▲ 왼쪽부터 마우로 와이너리의 마우로, 아바디아 레뚜에르따의 쁘띠 베르도(Petit Verdot-픔종) <사진 =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

마리아노는 20세기 후반 베가 시실리아를 30년 이상 진두지휘하면서 그 명성을 자리매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신만의 와이너리를 설립하면서 리베라 델 두에로 (D.O. Ribera del Duero)의 경계에 인접한 포도밭을 찾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현재 마우로의 와인은 지리적으로는 두에로 지방에서 생산되지만 까스띠야 이 레온(VdT  Castilla y Leon) 산지를 달고 출시된다. 같은 와인 산지의 또 다른 독보적인 예는 스위스 제약그룹 노바티스(Novartis)에서 운영하는 아바디아 레뚜에르따(Abadía Retuerta)이다. 이 둘은 정규 과정을 강제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고, 또 그런 꼬리표가 없어도 좋은 와인을 알아봐 주는 와인 애호가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의 편견에 대항하고 있다.

▲ 와이너리 아블라의 대표 와인, 아블라 13호(왼쪽)와 아블라 델 씰렌씨오(오른쪽). 아블라 델 씰렌씨오는 침묵의 대화라는 뜻으로 아블라는 스페인어로 말하다, 이야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진 = 와이너리 아블라 홈페이지>

그리고 최근 마드리드에서 인기 있는 와인 중의 하나는 한국에서는 조금 생소한 엑스뜨레마두라(VdT Extremadura)에 기반한 와이너리, 아블라(Bodegas Habla)에서 생산하는 와인이다. 스페인 내에서 조차 와인 산지로서는 생소했던 이곳이 이제는 지역의 특산품인 하몽 이베리꼬 (Jamón Ibérico)와 풍부한 식재료를 바탕으로 와인까지 겸비해 식도락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따라서 흔히들 활용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와인 등급 설명만 보고 더 이상 VdP 와인이 스페인 최고의 와인이라는 오해가 확산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마치 VdT 등급의 와인은 마셔 볼 가치도 없는 듯 평가 절하하는 단순 논리도 지양하였으면 좋겠다. 와인 등급 피라미드는 참고 지표 정도로 좋은 와인이 생산될 가능성의 순위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사람의 매력이나 능력이 상황과 과제에 따라 다채롭게 발전할 수 있듯이 와인 또한 그러하다. 편견과 오해를 풀고 보다 더 다양한 와인을 접해보자.
 

▲ 신재연 소믈리에

대학 졸업 후 8년여 직장생활을 뒤로 하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IE Business School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 이후 Escuela Española de Cata 에서 Sommelier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스페인의 와인과 먹거리를 공부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일하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신재연소믈리에  jane.jy.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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