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술집

술을 마시고 싶은데 딱히 마땅한 친구를 불러내기가 힘들 때.

연휴 때 나만 혼자 인 것 같아 의기소침해 질 때.
나중에 알고 보면,
친구도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사정일 때가 많습니다.

독일말에 Entfremdung seiner selbst 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들에게서 쓰이기 시작했는데 "자기 소외 "라는 뜻입니다.

거창한 철학 이론도 알고 보면 우리들이 이미 느끼고 있는 감정 상태를 어렵게 표현한 것들입니다.

언어와 감정 사이에 거리가 멀어서 낯설어 보일뿐, 와인도 그렇지 않은가요?
오감은 알고 있는데,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을 모를 뿐,
철학자들의 역할을 소믈리에 들이 대신해 줄 뿐입니다.

스스로를 외부부터 단절하고 소외시키는 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저녁에 TV를 보다가 와인이 등장 하길래 자세를 바로하고 끝까지 시청을 했습니다.

인: 인생 뭐 있어
생: 생각은 이제 그만
술: 술이 내 눈앞에 있잖아
집: 집중!!

아름다운 배우 하지원의 건배사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는지 와인으로 술자리가 시작됩니다.

소믈리에가 소개한 와인은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최고점을 받은 레드와인 스테그립 와인 셀러스 (Stag's Leap Wine Cellars) 였습니다.

프랑스 와인에 기죽어있던 미국 와인이 계급장 떼고 붙어서 당당히 1등 한 와인이지요.

와인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10년 후에 자존심 상한 프랑스의 리턴매치에서도 1등은 역시 미국 와인 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결국 와인을 꺼냈습니다.

한 잔을 마시는데 중학생 때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이 생각났습니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ss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시스 다.

자기소외의 알을 깨고 나오는 데는 와인이 묘약입니다.

▲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시스 다 <사진=pixabay>

인생 친구

▲ 20년지기 인생 친구 Josef Umathum (우마툼)

인생 친구 Josef Umathum (우마툼) 이야기입니다.
아주 촌스럽게 생겼고, 손을 보면 거칠기가 짝이 없습니다.
저하고는 20년쯤 된 친구입니다.

처음 Umathum 와이너리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쯤 달리면, Frauenkirchen(프라우엔키르헨) 이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귀찮을 정도로 자세하고, 오랫동안 이 집을 알려줍니다.
적어도 동네에서 인심은 잃지 않고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저는 예민한 편이라서 어떤 집을 방문하면 기를 느낍니다.
왠지 이 동네가, 느낌이 좋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서양 귀신을 본 이야기도 언젠가 기회 되면 깊은 겨울밤에 한번 해 드리겠습니다.

전화예약을 하지 않고 찾아간 터라 집주인은 외출 중이었고 와이너리 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기다렸을 때 집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도 얼굴을 발갛게 붉히면서( 화난 게 아닙니다 ) 미안해하면서 테이스팅 룸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샤워 좀 하고 오겠다며 와인 몇 병을 오픈해주고는 나가 버립니다.
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와인 시음 분위기입니다.
간섭하고, 눈치 보이면 부담이 돼서 집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시음한 와인은 Blaufaenkisch(브라우프렌키쉬) 라는 품종으로 만든 와인 이였습니다.

원래 이 품종은 레드와인치고는 경쾌하고 산뜻한 산도가 매력인 와인 품종입니다.
그러나 Umathum은 오크통을 사용해서 정교하고, 세련된 현대적인 스타일로 만들어 냈습니다.

붉은 보라 빛깔에 석류색이 약간 돌고, 놀라울 정도로 농밀합니다.

처음에는 새 오크통에서 (갓 볶은 헤이즐넛) 숙성된 향을 약간 풍기다가, 곧잘 익은 과일향으로 뒤 덮입니다. 서양 버찌(Cherry), 말린 바이올렛 향, 야생 나무딸기 향, 체리 잼같이 약간 달콤한 향도 느껴집니다.

입에 넣으면 부드러운 촉감과 알코올 기운으로 따뜻하면서 아주 풍성한 맛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풍성하고 따뜻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보통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탄닌도 실크처럼 부드러워서

집주인의 이미지와는 딴판입니다.
아주 감미롭고 부드러워서 입안에 여운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아주 농염한 여인과의 키스 후의 느낌이었습니다.

30분 후,

Josef Umathum은 샤워 전, 후가 거의 변화가 없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무려 10여 병의 와인을 오픈해 주면서 와인 하나하나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어냈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전학 간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자기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를 설명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아무 면식도 없는 외국인에게, 연락도 없이 들어 닥친 방문객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저렇게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만드는 와인은 어떤 와인들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아주 사소한 만남이, 사소한 스침이
인생에 큰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Umathum 과의 만남은,
저에게 와인 자체보다는,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의 철학과 성품, 포도를 키워내는 자연 같은 것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Umathum은 제가 가장 많이, 자주 방문하고 만난 사람이며, 언제나 표정의 변화 없이 덤덤하게

나를 만나주었으며,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거의 같은 조건에서 포도를 키워내고, 양조를 하고, 숙성을 해도 그 결과물인 와인은 사뭇 다릅니다.

머리 좋은 것은
가슴 좋은 것만 못하고
가슴 좋은 것은 손 좋은 것만 못합니다.

좋은 와인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눈은 맑습니다.
좋은 와인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손을 거칩니다.

이후 수많은 와이너리를 방문했고,
수많은 양조자 들을 만났습니다.
명품 와인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그 처음과 마지막에 내 친구 Josef Umatum 이 있습니다.

만난 지가 몇 년이 흘렸습니다.
찾아가면 어제 본 사람처럼, 씩 웃으며,
시음 와인 몇 병 내어주고 또, 샤워하러 가버릴 것입니다.

오늘은 인생 술집에서
그리운 인생 친구와 와인 한잔하고 싶습니다.
 

▲ 권기훈 교수

[칼럼니스트 소개]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 권기훈 a9004979@naver.com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