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이수백] 보이차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봤지만 보이차는 무슨 차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한국소비자가 많지 않다.  그럼 보이차는 도대체 어떤 차일까?

보이차는 운남성 보이지역의 이름으로 정의한 차(茶)다.

운남성에서 생산된 차는 모두 보이지역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보이차라고 하였으며 보이는 합니족 언어로 '수만채(水灣寨, 작은 호수 옆에의 마을)라고 하며 보(普)는 마을의 뜻이고 이(洱)는 작은 호수의 뜻이다. 보이라는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다르며 당(唐)나라의 남조국(南詔)시대에 ‘보일검(步日瞼), 남송(南宋)에 ’보일부(步日部), 원(元)나라에 ‘보일(普日)’, 명(明)나라에 ‘보이(普耳)’과 ‘普洱’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명나라(1620년)에 ‘전략(滇略)’에서 ‘보차(普茶)’가 처음 소개 되었고 명나라 말년(1660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普洱茶出云南’라고 소개한 후부터 지역명을 ‘普洱’로 사용하고 보이지역에서 집산하는 운남차를 ‘普洱茶’라고 하였다.
 

▲ 청나라 관청인 보이부(普洱府)의 현재 모습

운남차가 황실의 공차가 되는 것이 주(周)나라부터 이었고 보이차를 마시는 기록은 당(唐)나라부터 이었다. 그 후에 송(宋)나라와 명(明)나라를 거쳐서 청(淸)나라에서 전성기와 쇠퇴기를 지냈다. 그 이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과도기를 거쳐 1948년에 중국의 전통(고대) 보이차가 사라졌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華國) 성립하여 1985년까지 홍차, 녹차와 보이숙차만 생산되어 전량 수출하였고 1993년까지 중국에서 개인간의 차거래가 불법이었다.  2000년부터 차시장의 출현으로 보이차가 제 2의 전성기에 들어섰다. 우리는 보이차의 제 2전성기를 '현대 보이차의전성기'라고 한다.  

고대 보이차의 전성기--청나라의 전기와 중기(1660년~1870년)

▲ 서쌍판납주 보이 고차산 지도(우측 고6대차산 : 이무, 만전 ,망지, 의방, 혁등, 유락)

당시 고육대차산(古六大茶山)에 집집마다 차를 재배하고 판매하였다. 매년 춘차를 구매하러 온 상인들이 대거 차산에 찾아온다.

▲ 차마고도

차산에서 보이차와 관련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10만명 이상, 보이차를 각 지역으로 운송하는 말이 매년 5만필 이상 수요하였다.

고육대차산의 차가 차마고도를 따라 베이징과 티베트 이외에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나라에 판매되었고 1902년에 프랑스는 보이차 때문에 사모(思茅, 스마우, 현재의 보이시)에서 영사관을 설립하였다.

 

보이차의 쇠퇴—세금으로 쇠퇴하는 청나라 후기 보이차 생산(1871년~1910년)

청나라 후기에 청정부가 보이차에 부가되는 세금을 지나치게 올리면서 보이차 사업을 하는 상인들이 어쩔 수 없이 보이차사업을 포기하였고 보이차를 재배하는 농민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반 농사를 하게 되어 차나무들이 벌목되거나 황폐되었다.

보이차 생산의 재개—우여곡절의 중화민국 보이차 생산(1911년~1948년)

청나라 멸망한 후에 중화민국정부의 노력으로 보이차가 국제 차시장에 진출하였지만 1930년대에 인도차와 스리랑카차의 국제시장 진입으로 경쟁이 심했다. 1939년 2차세계대전 일본군의 침략으로 보이차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41년부터 보이차 생산을 재개하여 인도, 미얀마와 태국에 수출되었다. 민국시기(1911년~1948년)에 생산되는 보이차는 호자차(號字茶)라고 하며 수량이 매우 한정되어서 현재 매우 귀한 보이차가 되었다.

현대 보이차 생산의 시작--중국 계획경제 하의 보이차 생산(1950년~1985년)

1950년부터 1985년까지 중국의 시장경제 체제하에 운남성의 홍차, 녹차과 보이차 생산은 활발하게 진행하였지만 차는 시장에서 자유 거래할 수 없었으며 모든 차 생산의 목적은 오직 수출에 있었다. 1973년에 보이차 숙차 기술 개발되기 전에 보이차 생산은 유명무실(有名無實)하였고 홍차와 녹차만 생산하였다. 

현대 보이차의 전성기—2000년~현재

1978년 12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수립에 따라 중국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차의 개인 간의 거래는 1993년에 되어서야 전면적으로 허락되었지만 사실상 국내서 보이차 시장이 바로 형성하지 못하고 2000년 8월 8일에 보이차의 고향인 곤명에서 첫번째 차시장이 문을 열었다. 

보이차의 재2전성기에 들어가게 하는 계기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것이었다. 당시 홍콩의 보이차 상인은 사업을 정리하고 떠나기 위하여 창고에 깊숙히 보관하였던 100년 이상의 보이차 노차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 보이차들이 대만의 상인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들이 보이차에 대한 열광으로 대만, 홍콩, 마카오과 중국 대륙에서 보이차 바람을 불기 시작하였다. 보이차 중의 황제라고 불리는 노반장 보이차의 가격은 10년 사이에 1000배이나올랐고 곤명차창의 7542칠자병차도 400배나 올랐다.

보이차 시장의 급성장에 따라 많은 가짜의 보이차가 시장에 유통하게 되었다. 보이차 시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2004년에 중앙정부, 2006년에 운남성정부가 법을 통하여 보이차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으며, 2008년에 운남성정부가 다시 수정하였다.

중국정부 정의한 보이차

▲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

2008년 운남성의 정책 DB53/103-2008에 따르면 보이차는 운남성의 곤명시(昆明市), 초웅주(楚雄州), 옥계시(玉溪市), 홍하주(紅河州), 문산주(文山州), 보이시(普洱市), 서쌍판납주(西双版納州), 대리주(大理州), 보산시(保山市), 덕굉주(德宏州), 임창시(臨滄市)관할한 해발 1,000m~2,100m, 경사도가 25°이하의 PH4.5~6.0의 홍토(紅土, Laterite)과 황양토(黃壤土, Yellow soil) 지역에서 생산된 운남대엽종(Camellia sinensisvar. assamica(Mast.) Kitamura)찻잎을 사용하여 만든 차다.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중에서 적경, 여강, 소통, 곡정 지역은 운남성에 속하지만 차를 재배하지 않거나 소량이어서 법으로 이지역들을 보이차 산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보이차는 대부분 '서쌍판납주', '보이시', '임창시'와 '보산시' 4대 보이차 산지의 차다.

 

▲ 이수백 교수

[칼럼니스트 소개] 이수백교수는 중국 산동성 연태시에서 태어나 연태대학교 화학공정 학사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석사,  경희대학교 외식경영학 박사수료 후 현재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부회장 및 한국 티(tea)학회 회장으로 있고, 수원대학교 호텔관광학부 조교수로 근무하고있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늘 차와 함께 했지만,  2000년 한국으로 유학와서 보이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2011년부터는 매년 경희대학교 고재윤교수님과 함께 운남의 차산을 다니면서 보이차를 연구하고있다.

칼럼관련 문의 이수백 drlix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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