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산 빠비(Pavie)에 대해 파커는 '빛나는 노력의 성과'로 찬사를 보내며 98점을 부여한 반면, 잰시스 로빈슨은 ‘완전히 시시한 와인'이라고 깔아 뭉개며 20점도 아깝다고 평가했다.

이는 와인의 가치를 논할 때 감각의 민감성, 주관의 차이가 오직 한쪽의 주장만이 타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사건이면서도 와인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평가하는 일들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와인평론의 양대 산맥의 한 사람인 미국 변호사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는 와인을 일반 공산품으로 보았으며, 소비자들에게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여 치우침 없는 구매를 돕도록 해 주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다.

파커의 100점 등급 기준은 와인의 복잡함 때문에 기가 죽은 사람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파커의 점수만 따라가면 되었고, 가격은 점수로 책정하면 되었다. 또 다른 산맥인 영국인 휴 존슨(Hugh Johnson)과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은 와인의 점수보다는 와인의 일반적인 기술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이다.

나는 잰시스 로빈슨의 방식을 옹호하는 편이지만, 이들의 평가 방식이 와인계에 끼친 업적과 영향력을 차지하고, 일반 소비자들이 자신의 감각과 주관적인 판단의 개입을 주저하게 만든 부작용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와인을 전체로 보기보다는, 개별적인 요소들이 모인 집합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본질보다는 외형적 가치에 치중하며, 습관적으로 익숙한 패턴을 반복한다.

파커 100점은 와인과 파커 사이에 개별적인 소통의 결과이지, 나와 와인 사이의 점수가 아니다.

와인업계에서는 변하지 않는 벽이 있으며, 동의할 수 없는 패러다임이 있다. 겨우 백 개를 넘지 않은 언어적 표현방식으로는, 와인이 가진 미학적 가치, 개인이 가지는 맛에 대한 생리학적 감각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와인은 팔레트에 담은 물감과 같다. 하얀 캔버스에 자신만의 영혼을 그려가는 권리를 세상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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