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장고에서 오크통에 숙성되고 있는 와인

예전 청와대에서 와인 특강을 할 때의 일입니다.

강의가 끝난 후 한 비서관이 와인 한 병을 보여주며 언제 마시는 것이 좋은 지를 물었습니다. 그 와인은 ‘1993 무통 로칠드(Mouton Rothchild)’였습니다. 재외공관에 나가 있을 때 가져온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살펴보니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와인은 병목에서 내려가 있었고(세워서 보관해서 코르크로 산소가 유입되어 와인은 증발되었습니다. 와인은 반드시 눕혀서 보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병목을 감싸고 있는 호일은 병에 딱 붙어 있었죠. 아마도 열화현상 또는 높은 온도에 오래 보관해서 와인이 넘친 상태인 같았습니다.

저는 “지금 나하고 마시면 역사가 되니 오픈하여 마셔보자”라고 설득해서 열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상당 부분 산화가 진행되어 ‘명품 와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나 있었습니다.

와인의 초기 숙성에는 산소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산소 때문에 변질됩니다. 양조학자 에밀 뻬노(Emile Peynaud)는 저서 ‘Knowing and Making Wine’에서 오크통을 통해 유입되는 산소의 양은 대략 1년에 와인 1L 기준 2.5mL라는 것을 밝혀냈죠.

산소가 오크통 속에서 유입되는 경우는 ‘통속에 빈 공간이 남아있는 경우’, ‘증발된 와인을 보충하기 위해 오픈한 경우’, ‘통갈이를 하는 과정에서 산소와 접촉하는 경우’ 등 세 가지 정도입니다.

▲ 소형 충격흡수기, 코르크

오크통에서는 산소와 접촉하는 것이 도움이 되나, 병입 후에는 사정이 달라지죠. 흔히들 코르크가 숨을 쉰다고들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코르크의 세포조직은 산소와 질소를 머금고 있는 일종의 ‘소형 충격흡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르크가 머금고 있는 극히 소량의 산소가 와인 속으로 유입될 뿐입니다. 뻬노 교수는 “코르크로 스며드는 산소의 양은 병입 후 숙성에 전혀 변화 요인이 되지 않는다”라고 단정합니다.

와인 저장과 숙성의 목적은 와인이 가진 잠재력과 표현력을 극대화하고 인간에게 더 큰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발효는 와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고, 숙성은 완성된 와인이 여러 가지 생화학적 반응을 통해 익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의 숙성에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시간, 빛, 열, 습도, 추위, 진동, 용기 등이며, 그중 시간은 다른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요소입니다. 같은 조건이라면 시간을 제외한 다른 요소들이 와인의 숙성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 주택 지하에서 보관되고 있는 와인 <사진=AdamChandler86>

와인은 햇빛이 없고 서늘하며, 진동이 없고 적당한 습도가 있는 곳이 최적의 저장 장소입니다. 대부분의 유럽 주택들은 각 가구마다 지하창고가 있습니다. 위에 열거한 숙성에 필요한 최적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천혜의 장소죠. 상대적으로 와인을 저장하는데 열악한 주택 조건을 가진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보면 부러운 조건이기도 합니다.

와인 숙성에서 최악의 상태는 코르크로 공기가 들어가서 와인이 산화 돼버리는 경우입니다. 와인을 보관할 때는 눕혀서 보관하라고들 합니다. 눕혀진 상태에서는 코르크와 와인 용액이 직접 접촉된 상태에서 코르크가 공기 유입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연구결과에서는 세워서 보관하던, 눕혀서 보관하던 둘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와인은 약 70~80%가 물입니다. 수분이 증발되어 와인이 줄어들어도 실제 코르크를 통해 유입되는 산소의 양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물 분자는 복원력이 떨어진 코르크를 통해 증발되지만 물 분자 크기의 2배가 되는 산소는 코르크를 통해 유입되기가 어렵습니다.

의미 있는 와인의 변화는 수년 또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의 경우입니다.

▲ 일반적으로 와인은 눕혀서 보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국의 롱 애쉬튼(Long Ashton) 연구소의 연구에서, 와인을 2년간 눕혀서 보관한 경우와 세워서 보관한 경우 와인의 품질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유일한 결점은 세워서 보관한 와인을 오픈하기 위해서는 약 10배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많은 경우, 와인에 통용되는 상식은 실제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쳤다기보다는 검증되지 않은 상식들이 일반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소가 차단된 상태에서 와인병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바로 옛날 화학 시간에 배운 ‘산화와 환원 현상’입니다.

환원은 산소 분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산화는 수소 또는 전자를 얻습니다. 말없이 침묵하는 와인병 속에서는 산화와 환원을 반복하면서 인류에게 최고의 맛과 향을 선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와인에 존재하는 알코올, 산, 당 등이 화학반응을 거치며 에스테르(esters) 같은 물질을 생성시켜 오묘한 향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이것이 ‘숙성’의 비밀이죠.

와인이 최고의 상태로 숙성되었다는 말은 굉장히 유혹적입니다. 와인 애호가들도 항상 최고의 정점에서 마시기를 원하며, 현대 양조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와인들은 오랜 숙성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세계의 양조장들은 시장친화적으로 와인을 생산해서 와인을 조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품질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음 적기’ 또는 ‘시음 정점’이라는 말은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시판되는 대부분의 중저가 와인들은 빨리 소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와인의 정점은 와인의 일생에서 짧은 순간, 단 한 번입니다. 와인은 우리 인류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약 30년 후에 정점인 와인을 마시기 위해 고민하고, 기다리기엔 우리의 인생은 그리 길지가 않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도 성장하는 단계마다 기뻐하며 함께 추억을 만들곤 합니다. 와인이든 사람이든 절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한순간뿐일까요?

"와인은 병마다 다 달라요. 와인이 병입되는 순간부터 제각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로마네 콩티의 공동 소유주 라루 비즈 르루아(Lalou Bize-Leroy)의 말입니다.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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