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쇼핑이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물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옷의 경우가 그렇다. 어쩌다 확신이 들어 상의를 하나 골랐다 할지라도 다음에는 그에 어울리는 하의를 찾아야 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포함된 미션이 존재한다. 이럴 때는 나도 유명인처럼 옷을 고르고 입혀주는 스타일리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리 없는 나는, 웬만해서는 옷을 사지 않고 몇 안 되는 비슷한 옷을 계속 입고 다닐 뿐이다.

와인은 옷보다 더하다. 많아도 너무 많다. 옷이야 디자인과 질감의 차이가 눈에 띄지만, 와인은 마셔보지 않는 이상 병만 보고는 맛의 전부를 알 수가 없다. 전 세계의 와인메이커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와인은 다르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품종과 만드는 방법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생산지가 다르면 맛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마트나 백화점, 와인숍에 가도 수많은 와인들로 가득 찬 선반을 볼 수 있다. 그 혼란스러움에 차라리 편의점 한구석에 마련된 ‘오늘의 와인 픽(pick)’ 코너가 훨씬 친절해 보일 수 있다. 어쩌겠는가. 마시려면 혹은 선물하려면 일단 와인을 골라야 한다. 이때, 한 번쯤 시도해 보거나 생각해 볼 만한 몇 가지 사항들을 알아 둔다면 와인 코너 앞에서의 당혹스러움이 조금 덜 할지도 모른다.

▲ 와인을 마시려면 일단 선택을 해야 한다. <사진=송정하>

01. 물어보기

와인숍에 들어갔을 때 상냥한 얼굴의 직원이 ‘뭐,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라고 말하며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간을 갖고 와인 병과 라벨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와인을 고르는 가장 빠른 방법일 수 있다. 프로페셔널한 소믈리에, 와인숍 직원이라면 자신이 서빙하고 판매하는 와인에 대한 기본적인 혹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고객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궂은 땀을 흘려가며 이룩한 당신만의 분야를 내가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나는 아주 가벼운 와인이 좋아요. 드라이한 카베르네 소비뇽 말이에요. 좋은 거 뭐 있어요?’라고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친절하고 유능한 소믈리에라면 메를로 등이 블렌딩되어 부드러운 맛이 전해지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소개하거나 좀 더 열정적인 소믈리에라면 가벼운 느낌의 품종과 와인에 대해 선 채로 열렬히 설명한 후 조심스럽게 다른 품종의 와인을 추천할 수도 있다. 만약 와인에 대한 고객의 무지를 비웃거나 그를 이용해 무조건 비싼 와인을 들이민다면? 그곳을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가격과 음식

원하는 가격대를 미리 말하는 것은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당연한 일이다. 비싼 와인이 가장 좋은 와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단순히 저렴한 와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3만 원대, 5만 원대처럼 가격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또한 봄날의 피크닉에 먹을 치킨과 샐러드에 육중한 무게감의 네비올로 품종의 와인을 가져가지 않으려면, 함께 먹을 음식에 대한 고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취향 알기

결국은 취향의 문제다. 파릇한 샐러드가 걸쭉한 타닌에 휩싸이는 느낌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것도 나의 취향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어씨(earthy)한 향이 돋보이며 미네랄리티와 스파이시함을 잃지 않는, 꼬달리(Caudalie : 와인의 향이 입에 머무는 후각적, 미각적 지속 시간으로, 1 꼬달리는 1초를 가리킨다)가 7 정도는 되는 와인을 찾고 있어요’처럼,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불필요할뿐더러 모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나처럼, 내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모를 때가 더 많다. 반면 싫어하는 것은 대체로 분명하다. 예를 들어, 와인은 기본적으로 ‘신맛이 나는 음료’라고 생각하는 나는, 산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품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신맛이 두드러지면서 오크(나무)향이 지나치지 않고, 오래된 맛이 느껴지지 않는 신선한 느낌을 원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표현할수록 원하는 와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02. 사진 찍기

언젠가 마셨던 와인을 다시 한번 마시고 싶거나 비슷한 와인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이때에는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 것만큼 빠른 것이 없다. 찍어 둔 사진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사진을 들고, ‘이 헤어스타일대로 해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이건 연예인의 얼굴입니다’ 같은 서운한 소리를 들을 일도 없다. 내 입은 어떤 와인도 즐길 권리가 있다. 요즘에는 비비노(Vivino)처럼, 와인 레이블을 스캔하기만 하면 와인에 대한 모두 정보가 나오며, 나의 와인 목록도 만들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어서 더욱 편리해졌다.

03. 와인으로 의미 부여하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문화를 이루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는 역사적, 문화적 요소가 배어 있다. 특히 와인은 인생의 여러 이벤트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고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선물용으로 이보다 더 적당한 것이 있을까 싶다.

영국은 자녀가 태어난 해에 생산된 포트와인을 사서 그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 선물로 주는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기념일 등 각종 기념일과 같은 해의 빈티지를 가지고 있는 와인을 준비하여, 상대방과의 추억을 담은 작은 편지를 함께 건넨다면 그 정성과 수고로움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원하는 빈티지의 와인을 구하는 것은 비용을 요하기 때문에 힘든 일이다. 그러나 와인에 끼워 넣은, 소중한 사연의 편지는 특별한 와인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무기가 되곤 한다.

취향을 논외로 한다면, 축하 자리에는 샴페인만 한 것이 없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샴페인 잔 속 기포가 차오르는 기쁨 같아 즐거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꼭 샴페인일 필요는 없다. ‘병 내 2차 발효’라는, 샴페인과 같은 제조방식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크레망(Crémant) 혹은 스페인의 카바(Cava)가 샴페인의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04. 새로운 와인 즐기기

인간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은 조금 더 열심히 살아 더 많은 부를 쌓지 못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마셔보지 않은 와인들에 대한 예 치고 너무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냐 물을 지도 모르지만, 그 후회는 거창한 것이 아닌, 부모님과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나지 않은 일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인간군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세계적인 단편 작가 안톤 체호프는 죽음을 앞두고 한동안 마시지 못했던 샴페인을 찾았다고 한다. 사람이란 이렇게 뜬금없고 단순하며 본능적인 구석이 있다.

나는 얼마 전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베르네 프랑 그리고 메를로가 블렌딩된 보르도 스타일의 불가리아 레드 와인을 맛본 적이 있다. 벽돌색에 가까운 투명한 루비색의 이 와인은 10년이 지난 빈티지임에도 검붉은 과일의 신선한 맛이 끝까지 이어져 맛에도 투명함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토착 품종, 나아가 불가리아라는 나라 자체에도 관심이 생겼다. 이처럼 와인은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인, 즐길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 옷처럼, 이 옷이 내 부족한 몸매를 커버해 주는지 혹은 새로운 스타일이 나에게 너무 튀지는 않는지 등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일단 마셔보는 것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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