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선생님’ 소리를 종종 듣는다. 처음엔 프랑스에서였다.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던 건물에 새로운 한국인 학생이 들어왔는데, 프랑스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얻고 싶다며 내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프랑스의 행정부터 교통카드를 만드는 법 그리고 동네 지리까지, 몇 개월을 먼저 겪었다고 이런저런 소소한 팁 등 작은 정보라도 줄 수 있는 그 시간이 나는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나를 부르던 호칭이다.

그렇다. 그녀는 말끝마다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경우 어떻게 하셨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해 봐야겠네요.’ 이런 식으로. 살면서 한 번도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던 나는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혹시 다른 제3자를 말하고 있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녀가 지금 말하는 선생님은 나밖에 없었다. 나보다 서너 살쯤 많을까. 한국에서 하던 많은 일에 지쳐 쉴 겸, 프랑스어도 좀 배울 겸, 와인도 배울 겸 프랑스에 왔다는 그녀가 그 당시 나는 꽤 멋있어 보였다. 그런 그녀가, 그녀보다 어린 나를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처음 듣는 호칭이 어색하면서도 존중 받는 느낌이 들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물론 낯선 상대방을 향한 그녀의 선생님 호칭이, 오랜 사회 경험이 주는 습관에서 온 것뿐이란 걸 알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일을 시작한 지금, 이따금씩 선생님 소리를 들어도 정말 나를 부르는 게 맞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어색하긴 하다. 선생님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품(?)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분야에 어느 정도의 신뢰할 만한 전문성은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굽어 있던 등도 어쩐지 반듯이 펴야 될 것 같고. 한마디로 기합이 들어간다.

며칠 전 그날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과의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그가 업무로 만나는 상대방은 누구든 선생님이었겠지만 나는 그 선생님 호칭에 그날도 역시 살짝 고무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트렌치코트와 평소에 잘 신지 않는 하이힐을 벗고 집에 들어선 순간, 집에 오는 길에 들렀어야 할 마트를 그냥 지나친 게 생각났다. 이모가 겨우 한번 입고 주신 따듯하고 편한 패딩 점퍼로 갈아 입고 다시 집을 나서면서도 나는 그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주는 일종의 책임감 이라든지 상대방에 대한 존중 같은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친구들은 이미 한 번쯤 아니 이미 여러 번 들어봤다는 아줌마 소리 한번 안 들어 보다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지!

그런데 마트 앞에 웬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게 아닌가. 특별가에 행사하는 품목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젊은 직원 한 분이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머니ㅡ 어머니도 한 번 보고 가셔요ㅡ’’

그 행사 매대에서 무엇을 팔고 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녀의 어머니 소리 한마디에 내 눈엔 주변이 온통 검은 보랏빛으로 변해버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둔 물건을 기계적으로 사 들고 마트를 나오면서 나는 생각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충 위로 쳐올려 머리를 고정한 집게 핀이 문제일까 아니면 이모가 주신 지나치게 편한 점퍼가 문제일까.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렸으니 얼굴은 아닐 것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아무래도 문제는 이모의 점퍼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줌마를 건너뛰고 벌써 어머니로 불리는가 말이다!

▲ 하루 일을 마친 후 집에 가는 전차를 기다리는 저 남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 <그림=송정하>

생각해 보면 돈 없는 학생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주택보조금 다음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프랑스어 호칭이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말은 마담(Madame)과 무슈(Monsieur, ‘므씨유’에 가깝다), 그리고 마드므와젤(Mademoiselle, 요즘은 이 표현도 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잘 쓰지 않는다), 이 세 개가 전부다. 그 외에는 모두 이름을 부른다. 물론 개인이 일하는 조직에 따라 디렉터나 매니저와 같은 세부적인 직함은 있지만 호칭으로 쓰는 것은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환자나 간호사가 의사를 부를 때도 닥터라는 호칭은 잘 안 쓰고 그저 마담 누구누구, 무슈 누구누구면 족하다.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즈음, 한 번은 보르도 시내에서 노숙인 한 분이 지나가던 젊은 여자를 가로막고 돈을 구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 손엔 술병을 들고 있던 그 노숙인은 멀리서 보아도 꽤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길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당시 내가 놀랐던 점은 그를 상대하는 그 여자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잔 돈이 없어요, ‘무슈’.’’

그 당시 그녀의 대답에 내가 놀랐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놀랍다. ‘난 잔돈이 없어요, 거지 양반.’ 이렇게 말했다면 놀라지 않았을까? 무슈는 고귀한(?) 사람에게만 붙이는 호칭인 줄만 알았던, 내 서툰 프랑스어 실력을 탓하기에는 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편견이 너무 컸던 것 같아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럽다.

그때 이후로 나는 프랑스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를 마담이라고 부르면 굉장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라 좋고, 마드므와젤이라고 부를 때에는 오늘은 좀 어려 보였나?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자연히 내가 한국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호칭 문제다. 자신보다 지위가 조금 높아 보이면 사장님, 교수님, 사모님 소리가 절로 나오고, 행색이 영 아니다 싶으면 아저씨, 아줌마, 영감까지 별의 별 호칭이 다 나온다. 아버님, 어머님이나 언니 등 가족의 호칭을 낯선 상대방에게 쓰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음식부터 문화까지 모든 것이 한국 취향인 나지만 이 호칭만큼은 프랑스의 저 단순하고 평등한 세 가지 호칭을 수입해서라도 쓰면 안 되는 것인가 진지하게 국민청원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도 타이틀이 중요한 분야는 존재한다. 바로 ‘원산지 인증제도’가 적용되는 치즈나 버터, 소세지 그리고 와인 등의 식품이 그것이다. 원산지(호칭보호)인증제(Appellation d’Origine Protégée, 줄여서 AOP)란, 품질을 인정받은 지역 상품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을 표시하여 특별히 보호하는 제도인데 와인의 경우 그 의미가 매우 커서 하나의 특권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와인업자들이 다른 신대륙의 와인과 차별화되는 요소로 언급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과 테루아(terroir, 고유한 토양과 기후조건 등 자연환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 만큼, 그들이 재배하는 포도의 특정 지역과 생산 방법의 노하우를 소중히 여겨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가격이나 마케팅에서 우위를 가져다주는 이 원산지호칭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지역 호칭을 가진 와인너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가격 장벽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같은 포도 품종을 사용하며, 같은 양조전문가의 조언을 얻고, 같은 감정단에 의한 시음회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도 보르도 변두리 지역의 와인은 보르도의 다른 명성 있는 와인에 비해 턱없이 낮은 가격이 매겨진다. 그래서 이 가격 천장을 이기지 못한 일부 포도재배업자들은 보다 안정적인 수입을 찾아 포도재배를 그만두기도 한다. 마치 독학으로 얻은 지식과 수많은 경험이 박사 학위 있는 자의 영향력을 따라갈 수 없는 것과 같다.

한편 호칭과 타이틀이 주는 의미에는 영광도 있지만 그만큼 무거운 제약도 따른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하나로 어깨를 펴고 잠시 기합이 들어가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특히 프랑스의 원산지인증제도는 매우 엄격한데, 그 지역에서 재배하는 포도품종은 물론이고, 포도가 익은 정도, 알코올 함량과 수확량, 심지어 포도밭의 밀집도까지 세세하게 규정하여 해당 와이너리는 그에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르몽드(Le Monde)의 한 기사에서 원산지호칭제도(AOP)의 각종 규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단순하고 개성 있는 와인을 추구하며 새로운 세대를 표방하는 포도재배업자들을 다룬 적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경제적 현실로 인해 비교적 땅값이 저렴한 앙주(Anjou) 혹은 프랑스 남부의 루씨용(Roussillon) 지방에 정착한 이들이지만, 그들이 속한 지역의 AOP에 편입되기를 과감히 거부하고 실험적이며 혁신적인 와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서슴지 않는다. 기존의 법이 규정하지 않는 포도 품종을 심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아황산염을 사용하지 않거나 최소화하며 토양에 적합하지 않은 재배 농법을 배제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들의 와인은 복잡하지 않으며 내추럴 와인인 경우가 많다. 물론 특별한 지역 표시 없이, 말 그대로 그저 프랑스 와인임을 나타내는 등급인 ‘뱅 드 프랑스(Vin de France)’라는 이름 아래에서의 생산이다.

그럴싸한 타이틀을 얻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는 점에서 사람이나 와인이나 사정은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갖은 노력 끝에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사는 멋진 수식어를 갖는 날이 온다면 정말 성공한 인생이겠구나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때로는 그 안락한 타이틀에 안주하여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 나아가 내가 가진 것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혹은 운이 좋았을 뿐이지 헷갈리는 경우도 찾아온다. 물론 이런 고민도 일부의 특권이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불리든 그 호칭이 곧 나 자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저 내 이름 석자를 가지고 나를 지키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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