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사를 했다.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채로 하는 이사라 당장 누워 잘 침대며 먹고 마실 식탁과 의자 등 최소한의 가구가 필요해 가구 거리라는 곳을 갔다. 쇼핑에는 취미도 재주도 없는 나는, 입구에서부터 즐비한 비슷비슷해 보이는 가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벌써 정신이 혼미하다. 어떻게 하면 현명한 소비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둔 예산 안에서 편리하고 실용적이며 견고하고, 가격까지 합리적인 것을 골라야만 한다. 디자인은 다음 문제다.

그런데 그 디자인과 재질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으니 크나큰 가구 매장에 들어선 지 5분도 안 되어 발견한 오크 테이블이 그것이다. 호박색의 상판과 두툼한 다리가 인상적인 그 테이블은 자연스럽고 차분한 나무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내 관심을 놓치지 않은 직원분은 멀리서 달려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비장의 무기를 보여준다. 상판 아래의 고정된 철제 걸쇠를 풀면 숨어 있던 가운데 상판이 요술처럼 등장해 4인용 테이블은 금세 6인용이 되는 것이다. 솜씨 좋은 목수 할아버지가 손녀를 위한 책상을 만들어 준다면 이런 게 아닐까. 나는 흥분을 감추고, 둘러보고 다시 오겠다고 말을 하고 돌아섰다.

요즘엔 세라믹 식탁이 유행이라며 엄마는 나를 백화점의 반 가격으로 판다는 한 세라믹 테이블 코너 앞으로 떠민다. 실용적이기로 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엄마의 모습에 동력을 얻은 직원분은 가지고 있던 볼펜이며 문구용 칼 등 뾰족한 것들을 테이블 표면에 마구 내리꽂으며 세라믹이 얼마나 견고하고 다른 재질과 차별성을 띠는지 실험으로 보여주셨다. 하지만 스크래치와 급격한 온도 변화에 예민하다는 오크 테이블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나는 그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것이 세라믹 테이블의 두 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한 그 오크 테이블이다. 덕분에 예정했던 옷장 구입은 아직 기약이 없다.

붙박이장에 다 넣지 못한 옷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서랍장에 꾸역꾸역 들어차 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무가 주는 공간의 따뜻함 이란 게 이런 걸까? 나는 집에 있는 동안의 대부분을 이곳, 오크 테이블에서 보내고 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때 뿐 아니라 평소에 안 하던 일기나 가계부 쓰기 같은 것을 하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테이블 이곳저곳을 만져보거나 바라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나뭇결과 결마다 다른 밝고 진한 나무색이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쁘다.

식탁에 앉아 창밖을 보니, 눈길이 닿는 곳마다 빨갛고 노랗다. 그러고 보니 곧 구운 밤과 고구마가 어울리는 계절이다. 양팔을 쭉 벌려 테이블을 한 아름 안고 얼굴을 갖다 대니 어쩐지 은은한 나무 향이 나는 것 같다. 계절의 냄새와 분위기에 이끌려 나는 얼마 전 선물로 받은 호주 빅토리아 절롱(Geelong)산 샤르도네 한 병을 과감히 열기로 했다.  

투명한 금빛 짚 색의 와인을 잔에 따르니 모과 등 따뜻한 과일의 향이 풍성하게 퍼진다. 질감은 둥글고 부드럽다. 여름에 마시던 단순하고 상쾌한 맛의 샤르도네와는 확연히 다르다. 프랑스산 오크통, 그중에서도 35%를 새 오크통에서 숙성시켰다더니 과연 구운 견과류와 버터의 은은한 터치가 느껴진다. 신선한 생크림 향 사이로 레몬과 자몽의 깔끔한 뒷맛이 따라오는 걸 보니 오크의 영향은 과하지 않았나 보다.

보통 와인의 향을 말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포도 품종일 것이다. 하지만 숙성(혹은 발효) 과정에서 거치는 오크통이 와인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차가운 광물 느낌의 날카로운 신 맛을 자랑하는 프랑스 샤블리(Chablis)의 샤르도네와 바닐라, 버터 등의 향이 나는 부드러운 나파밸리(Napa Valley)의 샤르도네를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품종이라도 이렇게 맛이 다른 이유가 뭘까? 지역과 토양의 영향도 있지만, 결정적 차이는 오크통 숙성 여부에서 온다.

배럴(Barrel)이라고 불리는 이 오크통은 둥근 모양과 단단하면서도 잘 휘어지는 속성, 새지 않는 구조 덕분에 예로부터 술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이랬던 오크통이, 기술이 발전하여 스테인리스 스틸, 시멘트통 등이 보편화 된 오늘날에는 양조업자와 소비자들에게 꽤 고급스러운 옵션이 되었다. 오크 나무가 주는 특유의 향과 속성이 와인에 전해지도록 의도적으로 그 사용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 보르도 생떼밀리옹(Saint-Emilion) 지하 저장고의 오크통들 <사진=송정하>

오크통에서 숙성된 와인은 초기의 떫고 거친 맛이 부드러워져 마시기에 한결 수월하다. 오크통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조금씩 공기가 유입되어 거친 타닌의 맛이 순화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와인의 색과 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화이트 와인의 경우 푸른 빛은 점차 사라지고 견과류, 버터 등의 향이 더해져 강한 질감의 와인이 되고, 레드 와인의 경우 색은 진해지며 깊고 복합적인 맛의 골격 있는 와인으로 변모한다.

이 통을 만드는 오크 나무란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참나무 혹은 떡갈나무와 같은 종에 속하는데, 품질 좋은 오크통이라 하면 역시 프랑스산을 가장 고급으로 여긴다. 나무 조직이 촘촘하고 자르는 방식이 섬세하여 오크 향이 와인에 은은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즉 헤이즐넛, 담배 등의 섬세하면서 옅은 스모키한 향이 포도 본연의 맛을 더 잘 표현해 준다. 반면에 미국산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에서는 바닐라, 코코넛 등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한 향신료의 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숙성을 위한 오크통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되었는가도 와인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사용 기간이 오래된 오크통은 와인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어 약 5년이 지나면 그 수명을 다한다고 한다. 몇 번이나 우려낸 티백에서 진한 맛의 차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와인에서 이 오크 향이란 것은 어떤 역할을 할까?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후추 정도 되지 않을까? 적당히 조금 넣어 원래의 음식의 풍미를 돋우는 그런 역할. 본래 맛을 빼앗길 정도로 음식이 온통 후추로 뒤범벅이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냐 말이다. 그래서 오크통을 숙성에 사용하기로 결심한 많은 양조업자들은, 지나친 오크 향이 와인에 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물론 비용도 절감하는 이득이 있다!) 와인을 새 오크통과 오래된 통에 나누어 숙성시킨 다음 나중에 블렌딩 하는 방법을 취하여 와인 본래의 향과 맛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무튼. 아무리 봐도 사랑스러운 나의 새 오크 식탁에서, 은은한 오크향이 매력적인 샤르도네와 함께 먹을 오늘의 저녁 식사 메뉴는 버섯리조또다. 물론 요리사는 나다. 문제는 채소 육수에 들어갈 각종 채소인데, 정통 레시피에서 요구하는 샐러리가 없어서 고민이다. 육수에서 샐러리의 역할이 정확히 어떤 건지, 없을 때 대체할 수 있는 채소가 뭔지, 이제 막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나는 시작부터 난관이다.

그나저나 테이블에 그릇을 올려놓을 때마다 행여나 흠집이라도 나지 않을까 자꾸 신경이 쓰인다. 조심스러워서 뭘 할 수가 있나 말이다. 지켜보던 엄마가 딱하다는 듯이 한마디 하신다. ‘’식탁 모시고 살려고 그러니? 손 때가 묻고 길이 들어야 그 때 정말 니 것이 될 텐데.’’

듣고 보니 기사에서 본 한 프랑스인 오크통 제조업자의 인터뷰가 생각 난다. 자신이 만드는 프랑스산 오크통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큰 그였다.

‘’와인에서 ‘숙성’을 말하는데 쓰이는 단어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영어의 숙성은 단순히 ‘나이가 든다(ageing)’는 뜻이지만, 우리 프랑스에서는 ‘더 좋게 한다(élever)’는 의미니까요.’’

내 오크 식탁도 세월의 흔적이 쌓이면서 멋이 더해질까? 자잘한 흠집도 나와 보낸 정다운 흔적이 되어 함께 깊은 세월의 맛을 느끼게 될 날이 올까? 오래된 와인의 아련한 오크 향기처럼?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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