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좋아 창문을 열어 두었다. 잠시 볼일을 보고 돌아오니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열어 둔 창문 틈새로 들이친다. 후다닥 창문을 닫는다. 창문에 부딪히는 둔탁한 빗소리와 물을 많이 먹은 수채화처럼 가늠할 수 없이 뿌옇게 변해가는 창밖 풍경들. 나는 손가락 길이만큼 다시 창문을 열고 나뭇잎 위에 호도독 떨어지는 선명한 빗방울의 경쾌한 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가만히 귀를 갖다 댔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나에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 활기찬 낮이라면 비가 오는 날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한 숨 돌리는 평화로운 저녁시간이다. 비는 들뜨고 일렁여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 낮 동안의 내 허물을 조용히 덮어 주기도 한다.

▲ 비 갠 어느 오후, 우산을 들고 <그림=송정하>

아마 한국에서 장마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몇 년간의 외국 생활은 한국과 관련한 모든 것을 그립고 소중하게 여기는 습관을 만들어 동아시아에만 있다는 지리한 장맛비도 내게는 반갑고 정겹게 느껴진다. 그러다가도 장마라면 으레 따라오는 주택 침수나 홍수 위험 등의 단어를 떠올리면 비가 좋은 나는 괜스레 고개가 숙여진다. 요즘에는 가뭄과 마른장마로 인한 피해가 더 하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새싹이 움트는 봄부터 알록달록 다양한 색을 보여주는 자연을 거쳐 기나긴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기까지,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내리는 시기는 레드와인이 생각나는 거의 유일한 시기인 것 같다. 축축한 공기속에서 퍼지는 붉은 과실의 향기와 부드럽게 넘어가는 타닌 그리고 살짝 내려간 체온을 기분 좋게 데워주는 적당한 알코올이 비 오는 날이라는 한 폭의 풍경화를 따듯하게 채워주는 느낌이다.

최근에 공들여 마련한 와인셀러 속 차곡차곡 모아 둔 와인들 중 지금 이 순간 마시고 싶은 하나를 고른다. 그동안 모셔 둔 와인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잘 숙성된 레드와인이면 어느 것이든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중 카베르네 소비뇽과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등이 블렌딩 된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산 와인을 하나 꺼냈다. 이왕이면 좀 더 확실하고 본격적인 진짜(?) 레드를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르크를 열어 바로 잔에 따르고 한두 번 잔을 흔들었을 뿐인데 검붉게 익은 과일의 향기가 단번에 코를 자극한다. 부드러운 타닌과 농축된 과일의 진한 맛이 입안을 풍부하게 감싼다. 오크, 초콜릿향과 함께 은은한 숲의 향기가 창밖에서 불어오는 빗속의 축축한 흙냄새를 연상 시켜 바로 지금 내가 기다리던 맛을 내는 것이 참 신기하고 재밌다.

좀 더 습기가 많아 눅눅했다면 옅고 경쾌한 색감과 신맛이 도는 피노누아를 선택했을 것이다. 어두침침한 장마철에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기분을 생기 있게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와인은 음식을 위해 존재한다지만 비 오는 날 마시는 레드 와인에는 곁들이는 음식이 필요 없다. 오로지 지금 마시는 이 와인에만 집중하고 싶다. 오늘은 와인이 주인공인 것이다. 어떤 음식의 냄새와도 섞이지 않은 감미로운 와인 향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창밖을 후드득 두드리는 빗소리와 비 내음만이 비 오는 날의 레드와인을 조화롭게 감싼다.

와인 잔을 들고 창 밖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날 내 삶을 가득 채웠던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비가 오는 날은 맑은 날보다 걷는 재미가 있다고 말 한 초등학교 시절의 맑고 순수했던 친구, 주륵주륵 비 오는 날 각자 생맥주 하나씩 시켜 놓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 그리고 한 손엔 우산 또 한 손엔 졸졸 따라다니기 좋아하는 나를 붙잡고 간신히 버스 계단을 오르던 보고싶은 할머니…

새로 시작하는 편지에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금 비록 떨어져 있어도 언젠가 우리가 함께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붉은 와인을 마시며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던 중 불현듯 들었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中 « 장마 », 박준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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