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지도 어느새 반년이 넘었으니 보고 싶은 사람들도 다 만나고 먹고 싶은 한국 음식도 다 먹었겠다. 이제는 내가 정말 프랑스에서 살았었나 싶다. 와인 관련 일을 하는 남편 덕에 여러 와인을 맛볼 기회가 많은 편이지만 근처 마트에만 가도 다양한 와인이 즐비했던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가끔 생각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국제주류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꽤 반가웠다. 매년 12월 보르도에서 열리는 보르도 테이스팅(Bordeaux Tasting), 2년에 한 번 열리는 비넥스포(VINEXPO)등의 행사와 비교도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 더러 무엇보다 오랜만에 세계의 와인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외국의 와인 부스는 많지 않았다. 처음 참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코로나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입장객의 동선을 나도 그대로 따라갔다.

꽤 많은 사람이 붐비는 그곳은 전통주 코너였다. 내가 익숙하게 아는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쯤 섞인 채로 마치 외국의 어느 주류박람회에 처음 들어선 사람 마냥 두리번거리며 낯선(?)전통주 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쌀, 과일 등 국내 농가에서 수확된 지역 특산물을 활용해 빚은 전통주를 생산자가 직접 들고 홍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전통적인 농산물인 사과, 오미자, 유자, 인삼에서부터 생소한 오가피, 노루궁뎅이버섯을 이용한 술까지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병에 담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작고 귀여운 병에 이름부터도 서정적인 백제명주 4종 앞에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술에 백제의 지명과 역사, 인물들을 접목해 백제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모습이 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중 사비의 꽃, 녹천 한산소곡주를 조금 맛보았는데 고소하고 감미로운 술맛과 부드러운 목넘김이 인상적이었다.

그 밖에도 안동의 진맥소주, 화요, 청주 신선주 등 말로만 듣던 고급 증류주들이 보였다. 한편 도수 높은 술들을 탄산수 혹은 토닉에 희석해 레몬을 곁들인 칵테일 바가 제공되었는데, 서양의 술이 아닌 우리 술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이 참 신선한 아이디어로 다가왔고 실제로 맛도 좋았다. 나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들어 각 주류 부스의 이름과 산지를 죽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영동군이 꽤 많이 보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하고 생산자분께 여쭤보니 충북 영동이 사과, 배, 복숭아 같은 과일이 풍부하게 재배되는, 말 그대로 과일의 성지란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영동은 국내 최대 포도 산지이며 국내 유일의 포도, 와인산업특구였다. 프랑스에서 와인을 배우며 프랑스 지도를 샅샅이 훑고 암기한 내가 한국의 대표적인 과일 산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참 부끄럽고 씁쓸했다.

한국의 와인 코너로 넘어가 알렉산드리아 머스캣으로 만들었다는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시음했다. 머스캣 특유의 꽃향기가 은은하게 발산되지만 좀 더 신선한 느낌이 강한 이 와인의 라벨을 보는 순간 나는 조금 의아했는데 설탕이 첨가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부스에 계시는 분께 이유를 물으니 일정한 수준까지 알코올 농도를 끌어 올리기 위해 가당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요새는 생산자의 기술, 와인의 품목에 따라 가당을 하지 않고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양조장이 늘고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신다.

좀 더 걸으니 정겨운 사과, 감말랭이를 내놓은 부스가 보인다. 계속된 시음으로 얼얼하게 무뎌진 입을 달래기 위해 감말랭이를 한입 물었다. 그 옆에는 머루, 캠벨 등을 이용해 만든 레드와인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거 다 내가 직접 만든 거에요. 나 충청도에서 왔어요. 다 내가 만들었어요.’’

웃느라 반달이 된 눈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생산자분의 정감 어린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내가 그동안 알고 마시던 와인과는 달리, 평소 먹어왔던 포도 그대로의 맛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 천안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시던 외할머니가 만드신 거봉 포도주가 생각 나서 나는 괜히 기분이 노곤해졌다.

전국의 지역 특산물들을 보고 맛보는 동안 내가 있는 곳이 서울 한복판인지 아니면 지방의 어느 흥겨운 장터인지 잠시 기분 좋은 혼란함을 느꼈는데 약간의 취기와 함께 프랑스에서 다니던 어학원에서의 기억이 꿈처럼 떠올랐다.

그 날은 자기 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 때 한 일본인 친구가 일본의 사케를 소개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 단계별로 도정되어 있는 쌀 알 견본들이었다. 그 친구는 쌀 한 알을 얼마나 깎았느냐에 따라 사케의 등급이 갈리며, 50% 이상 깎아낸 최고급 사케 ‘다이긴조’의 우수성에 대해 설파했다. 그 발표는 결국 강사와 학생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이웃 나라의 술을 멋들어지게 소개하는 모습에서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를 느끼는 정도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지금까지 영 찜찜하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어느 학생이 한국의 소주는 사케와 어떻게 다르냐고 나에게 물은 것이다. 지금이라면야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현재 흔히 한국에서 마시는 주정에 물을 탄 희석식 소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도 각 지방의 특색을 보여주는 고급 전통 소주가 많이 있다’라고 응수를 하겠지만, 어렴풋이 전통방식의 소주가 있다고만 알던 그 당시의 나는 너무도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편 와인 학교를 다니면서 받은 많은 질문도 지금에 와서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당시 프랑스인들이 나에게 많이 한 질문은 ‘그럼 너는 한국에서 와인 양조를 할 것인가?’ 이다. 사실 직접 한국에서 와인을 만들 목적으로 외국에서 와인을 배우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선진국의 와인을 감별하고, 수입하고, 소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배울 뿐인데 그 당시 나는 그 질문이 턱없이 거창하고 이상적이기만 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치스러운 무엇이 아닌 농민, 생산자의 기술과 철학 그리고 자연이 일구어낸 ‘농산물’로서의 와인을 한국 땅에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받은 그 질문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술은 그 나라의 음식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음식을 가장 돋보이는 방법으로 진화한 것이 술이다. 갓 잡은 우럭으로 만든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매운탕에 굳이 와인을 곁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와인이 함께 할 여지를 남기거나 와인이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 많은 서양과 달리 그 자체로 완벽한 한국의 음식은 와인을 매칭하기 까다롭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럴 때는 굳이 진한 바디감의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보다 가벼운 바디감에 적당한 당도와 산도가 균형을 이루어 은은한 향이 나는 캠벨 품종의 우리 레드와인을 함께하는 것은 또 어떤가.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우리의 음식과 음악, 영화를 찾는데 우리 술이라고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 중국, 일본과 다른, 각 지역 장인들의 개성이 빚은 전통주와 우리 고유의 포도 품종으로 우리 땅이 만들어 낸 와인 혹은 누룩, 쌀과 함께 빚어 전통주의 깊고 부드러운 맛과 과일의 신선한 맛이 어우러진 과실주 등 우리 술은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 와인 강의를 시작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 포도 품종과 한국와인을 소개할 날이 오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공부해야 하겠지만.

▲ 우리 와인이 세계의 와인과 마주 앉는 그 날이 오길 기대한다. <그림= 송정하>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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