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혹은 동경했던 유럽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문장이다. 물론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표현한 찰리 채플린의 저 유명한 말을 조금 다르게 그리고 단순하게 적용하자면 말이다.

유럽의 도시 풍경은 한 폭의 그림엽서 같지만, 거주민들에겐 그곳도 생활의 터전일 뿐이다. 파리를 소개하는 여행 책에 낭만적으로 묘사된 ‘벤치에 앉아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은 사실,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 직장인일 수 있고 그가 먹으며 보는 것은 문학적, 철학적 사유로 가득한 책이 아니라 급히 업무상 처리해야 할 서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엔 며칠 내로 내야 할 공과금, 세금들로 걱정이 한가득 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나도, 귀국한 지 5개월이 되도록 닫히지 않던 프랑스은행 계좌 문제로 속을 썩였기 때문에 유럽의 풍경을 낭만적으로만 볼 수 없었던지도 모르겠다. 프랑스는 은행 계좌 유지비가 꽤 나가기 때문이다. 그랬던 계좌가 드디어 닫혔다는 메일을 며칠 전 받았다. 업무처리 속도가 상당히 느리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의 행정 서류도 이걸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하지만 메일을 받은 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나니 마음 한 켠엔 지난 5년의 보르도 생활에 대한 아쉬움이 생기고 나아가 애틋함과 그리움이 자리 잡는다. 이 간사한 마음을 어찌할꼬.

광장에서 촤락 촤락 소리를 내며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아이들, 뜀박질을 싫어하는 사람도 한 번쯤 발걸음에 속도를 내고 싶게 하는 갸론강(La Garonne)의 시원한 강바람. 어둑해 지면 허공에 매달린 주황색 불빛 하나에 의지해 집으로 돌아오던 골목길. 와인이 익어가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흘러가는 이 도시에서의 순간들을 나는 과연 충분히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겼던가.

시험을 핑계로 책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종종 보르도 시내를 목적도 없이 걸어 다녔다. 와인의 수도답게 와인과 관련한 시설과 와인샵, 꺄브 등이 밀집되어 있어 내가 하는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도 되는 등 좋은 자극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다른 여행객처럼 나도 큰 건물들을 따라 무작정 걷는 것이다.

와인 시음관련 각종 교육과 이벤트를 제공하는 보르도 와인협회(CIVB)와 보르도 관광안내소 주변에서는 시내 투어를 하려고 몰려든 개인 관광객들과 단체로 온 깃발부대를 볼 수 있다. 그들 앞으로는 지붕이 뚫린 투어용 이층 버스와 길고도 두툼한 트램이 사이좋게 교차하며 지나간다.

트램이 지나가는 코메디 광장(Place de la Comédie) 양편에는 보르도 대극장(Grand Théâtre)과 인터컨티넨탈 호텔이 마주 보고 있다. 광장 한복판에 있는 시계탑과 대극장, 호텔 등 18세기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통일성 있는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야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여행자의 설렘이 느껴진다. 화사하고 따뜻한 낮의 이미지와 달리 밤의 이 광장은 나에게 특히 잊을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한데, 추운 1월 날, 인턴 자리를 구하기 위해 밤이 늦도록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분주히 돌아다니던 곳이기 때문이다.

▲ 보르도 대극장 돌계단에 앉아 코메디 광장을 바라보며 그린 스케치 <그림=송정하>

이곳에서 보르도 시청(Hôtel de ville) 행 트램을 타면 보르도 대성당(La cathédrale Saint-André)이 나온다. 크리스마스면 대형 트리가 설치되는 이곳 주변 광장은 성당과 시청이 있는 곳답게 좀 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나는 이곳에서 우연히 헌책 벼룩시장이 열리는 것을 발견하고 거의 매주 가곤 했는데 귀국할 때는 그곳에서 사들인 책들 때문에 꽤 많은 배송 비용을 들여야만 했다.

배도 채울 겸 잠시 쉬어 가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와인 바, 부티크가 즐비한 생 피에르 거리(Quartier Saint-Pierre)로 향한다. 그곳은 항상 배고픈 사람들로 넘쳐나서 어디를 가든 줄 서는 건 감수해야만 한다.

이 거리를 따라 내려오면 부른 배를 소화시키기에 적당한 부르스 광장(Place de la Bourse)이 나온다. 갸론 강을 마주보며 지어진 이곳은 보르도의 상징같은 장소로 도시와 건축물이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받는데, 매년 12월마다 보르도 테이스팅(Bordeaux Tasting)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 부르스 광장과 갸론 강 사이에는 물의 거울(Miroir d’eau)이라는 분수광장이 있는데, 바닥에서 물이 뿜어 올라 발목을 살짝 적실 정도로 고일 때 그 물에 비친 부르스 광장의 건물은 실제 모습과 완벽히 대칭되어 장관을 이룬다. 이 장관을 담기 위해 사진을 찍어대는 어른들과 물웅덩이를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갸론 강가를 향해 좀 더 가면 너른 광장 겸 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매년 초여름 보르도 와인 축제(Bordeaux Fête le Vin)가 펼쳐지는데, 20유로를 내고 와인 잔을 하나 받으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약 80개의 AOC(원산지통제호칭이 부여된 와인)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강가엔 영화에서나 볼 법한 범선들이 전시되어 있는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함께하는 이 축제를 통해 와인이 지역의 주민들과 얼마나 친근하고 가깝게 존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대중적인 축제도 올해는 코로나의 여파로 내년으로 미뤄졌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보르도는 현재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지 오늘도 괜히 궁금해서 현지 소식을 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린다.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이제 조금도 없지만 지난 시간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한 보르도에서의 시간은 역시 소중하고 감사한 경험이다. 어느 곳에서나 문제들은 존재하고, 우리는 그 문제 속에서 나름의 방법을 찾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와인의 길을 가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 이순간 보르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어째 희극으로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희극까지는 아니더라도 희비극이 공존하는 예전의 일상을 되찾길 오늘도 희망을 가져본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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