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이 맑은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은 파란색, 잔디와 나무는 초록색, 가을 겨울 내내 검은 자켓만 걸치던 사람들도 알록달록 옷을 바꿔 입고 공원의 벤치에, 강을 마주한 잔디밭에, 그것도 아니면 길가의 계단에 무심하게 자리를 잡아 각자의 초여름날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늘 만남을 미루고 있던 나는, ‘날씨도 좋은데 오늘 저랑 피크닉 가실래요?’ 라는 그녀의 다정한 제안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항상 내세우던 학교 시험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당분간 특별한 일정도 없으니 만남을 거절할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그녀에게 그동안 쌓아 놨던 여러 질문을 쏟아 내고 조언을 구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프랑스살이를 시작했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부지런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실제로 부딪혀 얻은 경험으로 프랑스의 행정처리부터 보르도 구석구석의 지리까지 모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빨간 유모차를 끌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내가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뱃속에 있던 그녀의 딸은 좁은 유모차에 끼어 앉아서 가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입고 자랑하며 걷길 좋아하는 나이가 되어 자기보다 훌쩍 큰 유모차를 밀며 걷겠다고 난리다.

‘’오셩(Auchan:프랑스의 거대유통업체)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샀는데, 깜박하고 오프너를 안 가지고 왔어요 !’’

다 방법이 있다면서 한 손은 아이 손, 또 한 손은 유모차를 씩씩하게 밀며 근처 케잌 가게로 향했다. 초콜릿 케잌 두 조각을 주문하길래 항상 한 박자 느린 나는, 내가 계산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녀가 내겠다고 한사코 거절한다. 계산을 다 한 그녀가 점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와인 좀 따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차가운 인상의 프랑스인 점원이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달 눈을 한 그녀의 생글생글한 미소 덕분일까. 점원은 능숙한 솜씨로 흔쾌히 와인을 따 주었다.

우리는 시원하게 강이 보이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달달한 케잌을 준비했으니 그녀가 가져온 와인은 이왕이면 달콤한 꽃향기와 과일 맛이 농축되어 적당히 단 맛이 도는 디저트 와인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나는 시험을 앞두고, 와인과 음식의 궁합에 대해 서양의 입맛에 맞춘 이론들을 별 생각 없이 암기하는 데에 꽤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꺼낸 와인은 레몬 같은 신맛과 은은한 향을 풍기는 뮈스카데(Muscadet)였다.

‘’뮈스카데는 달달한 와인이라고 들었는데, 전혀 아니네요?’’

‘’뮈스카(Muscat, Moscato, 머스캣, 모스카토)랑 헷갈렸나 보네요. 뭔들 어때요! 상큼하고 좋은데요?’’

내 위로(?)에 ‘그래도 지역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은 와인이에요’라고 말하며 멋쩍은 듯 배시시 웃는다.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많은 일을 하던 그녀는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가이드 일을 하며 어느정도의 보르도 와인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의 와인은 익숙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뭐 대수겠냐마는.

대서양의 해풍이 어울리는 시큼한 포도로 만든 뮈스카데를 한 모금 마시니 와인과 날씨가 이보다 더 완벽한 궁합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싶다. 갸론강(La Garonne)에서 불어오는 시원하면서도 따듯한 바람이 뮈스카데의 미네랄 풍미를 더욱 자극하는 듯하다.

산들바람과 와인에 취해 우리는 서로 말도 없이 강물을 바라보던 중 저 멀리서는 거대한 크루즈 한 대가 강에 정박하려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나 나나 그렇게 크고 화려한 크루즈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네덜란드 국적의 그 크루즈는 각 객실마다 테라스를 갖췄는데 아늑한 객실과 화려한 레스토랑이 창문을 통해 멀리서도 훤히 보였다. 승객의 대다수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아챈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한국에 계신 부모님으로 흘러갔다.

시작은 내가 먼저였다. 언젠가 부모님께 크루즈 여행을 보내 드리는게 내 소망이라고 나는 말했다. 마치 크루즈 여행 한 번으로 효도의 처음과 끝이 마무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가 대답하길,

‘’우리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요.’’

너무 많은 결핍 속에서 할머니 홀로 자신을 키운 이야기, 이제는 구십이 넘은 할머니를 한국에 남겨두고 딸아이와 자신의 인생을 위해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봐야 하는 현실 그리고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까지. 그녀는 혼자서 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4년을 알고 지낸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타지 생활의 피곤함과 엄마가 보고싶다는 이유로 이젠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좀 전의 내 말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따라 울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는 괜히 초콜릿 케잌을 한가득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천진하게 공을 튕기며 노는 그녀의 딸을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 소녀는 엄마가 되어 삶을 계속해 나간다. <그림=송정하>

쌀쌀맞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생글생글한 미소와 다정한 말투는 그녀 나름의 생존을 위한 무기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늘 사람이 그리워 만나는 한국인마다 자신의 많은 부분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그녀에게, 나는 귀국하기 며칠 전 처분하기에 애매한 몇개의 살림들을 전해줬다. 그녀와 그녀를 닮아 사람을 좋아하던 그녀의 딸은, 박수까지 치며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라 했다.

얼마전 외롭지 않냐고 묻는 철없는 내 메시지에 그녀는, 딸이 있는데 외로울 리가 있겠냐는 씩씩하고 어른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어리석은 질문을 맞받아치는 그녀다운 대답이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5월의 그 날, 우리는 미끈하게 새하얀 크루즈 뒤로 주황, 보랏빛이 출렁이는 노을이 다 지도록 그녀가 가져온 뮈스카데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날따라 유난히 톡 쏘는 상쾌하게 시큼한 뮈스카데가 알싸하지만 젊고 희망으로 가득 찰 그녀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었다.

▲ 송 정 하

법대를 나왔지만 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났다. 보르도 CAFA에서 CES(Conseiller en sommellerie:소믈리에컨설턴트 국가공인자격증), 파리 Le COAM에서 WSET Level 3를 취득했다. 사람이 주인공인 따뜻한 와인이야기를 쓰고 싶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송정하 noellesong05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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