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말경부터 스페인의 풍광에 마법 같은 변화가 찾아온다. 추위에 움츠렸던 아몬드 나무에서 하얀 꽃들이 일시에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스산한 겨울 풍경과 쌀쌀한 찬 바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에도 아랑곳없이 아몬드 나무는 잎도 없이 화려한 꽃으로 들판과 산야를 뒤덮기 시작한다. 마치 엄동설한에 백색의 반기를 든 혁명가 마냥 가냘픈 꽃잎을 피워내면 이제 봄은 그리 멀지 않았다는 위안을 준다.

▲ 아몬드 꽃이 활짝 핀 스페인 프리오랏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 지방에서 시작하여 안달루시아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확산하여 스페인의 동북쪽 까딸루냐산악 오지인 이곳 프리오랏 산 중턱까지 봄의 전령이 찾아왔다. 경사가 심한 프리오랏(Priorat) 포도밭 사이로 아몬드꽃들이 일제히 피어올랐다.

▲ 프리오랏의 석양

프리오랏(Priorat)이란 이름은 ‘수도원’이란 뜻이다. 약 800년 전에 ‘스칼라 데이’라는 수도원이 이곳을 관할하였으며, 덕분에 동네 이름이 수도원이 된 것이다. 스페인 까딸루냐의 남서쪽 타라고나(Tarragona) 지방에 자리 잡은 험준한 산악 오지에 위치해 있다. 프리오랏은 색이 짙고 강한 레드 와인을 주로 생산하며, 1990년대에 국제 와인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 프리오랏 마을 진입구

19세기 말까지 싸구려 와인을 생산하던 이곳은 필록세라가 창궐한 후, 완전히 황폐화되어 포도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모두 떠나 버린 황무지가 되었으나, 1980년대부터 5명의 젊고 패기 있는 혁신가들이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을 빚어내면서 떠오르는 별이 되었다.

▲ 고블레 방식의 포도나무 위로 지는 프리오랏의 석양

르네 바비에(René Barbier)와 알바로 팔라시오스(Álvaro Palacios) 같은 전설의 와인메이커들이 불과 20여 년 만에 프리오랏 와인을 세계적 명품 와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곳 토양은 화산토에 기원하고 있으며, 독특한 석회석 벼랑과 점판암 토양인 리꼬레야(llicorella)로 뒤덮여 있다.

 

▲ 프리오랏 토양의 특성을 말해주는 리꼬레야 점판암

아몬드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상징으로, 스페인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아몬드 생산국이다. 대부분의 아몬드 나무는 지중해 지역에서 잘 자라며, 연간 26만 톤의 아몬드가 생산되고 스페인 요리의 식재료로 자주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몬드(Almond)는 프랑스 고어 'almande' 에서 유래하였고, L을 발음하지 않아 아몬드라 불린다. 원래 이란이 원산지이나, 페르시아, 지중해 국가, 북미 대륙 등지로 퍼져나갔다. 식물분류상 Prunus (벚나무속)으로, 매실, 버찌, 복숭아, 살구, 앵두, 자두와 같은 속이다. 엄격히 말하면 nut가 아니라 핵과(Stone Fruit)이다.

▲ 우리나라 매화처럼 정겨운 아몬드 꽃

아몬드는 아름다운 꽃과 맛있는 씨 덕분에 일찌감치 인간에게 길들여져 재배되었다. 초기 청동기시대(3000-2000 BC)부터 키워졌으며, 이집트의 투탕카멘 무덤에서도 발견(1325 BC) 된 바 있다.

유명 화가들의 그림 소재로도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꽃이 유명하다.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그려진 커다란 아몬드 꽃 가지들은 반 고흐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아몬드 나무는 1월 말경 일찍 꽃을 피워 올리기에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 구릉진 포도밭에 찾아온 봄의 전령

반 고흐는 일본풍의 그림에서 꽃의 주제와 대담한 윤곽, 그리고 평면 위에서의 나무 포지셔닝을 하여 아몬드 꽃 그림(1890년)을 완성했는데, 이 그림은 그의 친동생 레오 부부가 아기를 낳자 선물로 주려고 그린 작품으로, 그가 죽던 1890년에 만들어졌다.

1888년 3월 중순, 반고흐는 그날의 날씨를 기록하고 아몬드 꽃들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는 날씨가 변덕스럽고, 종종 파란 하늘과 함께 바람이 불지만, 아몬드 나무는 어디에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고흐의 동생 테오는 1890년 1월 31일 빈센트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의 탄생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는 마음에 빈센트는 테오부부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동생과 매우 가까웠고 새로 태어난 조카 빈센트를 축하하기 위해 새 생명을 상징하는 아몬드 꽃 그림을 그려 주었던 것이다.

김욱성은 경희대 국제경영학 박사출신으로, 삼성물산과 삼성인력개발원, 호텔신라에서 일하다가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어 프랑스 국제와인기구(OIV)와 Montpellier SupAgro에서 와인경영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25개국 400개 와이너리를 방문하였으며, 현재 '김박사의 와인랩' 인기 유튜버로 활동중이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김욱성 kimw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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