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집적(集積), 그리고 와인 시음의 함정 <사진=Pixabay>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경험한 기억의 축척이며 살아온 시대의 총량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험과 감각적인 느낌을 사회적인 소통의 수단으로 치환되는데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체감하며 소통수단의 가난함에 절망하고는 합니다. 예술적인 감동을 전달하거나, 와인에 대한 경험을 전달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우리들의 감정은 주관적인 경험이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도 상대적인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와인에서의 감동을 전달하기는 더욱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시각과 청각보다는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미각과 후각을 이용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와인에의 감동으로 이끄는 지식과 경험의 총체인 '기억의 집적' 역시 대단히 언어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각적인 느낌은 태양처럼 분명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암흑처럼 어둡습니다.

감동적인 피노누아를 마실 때 느끼는 감각적인 특성에 대한 의식의 경험이 빈약한 몇 가지의 단어로 설명되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진정한 와인시음의 목적은 도출된 결론이 또 다른 경우에서도 재현될 가능성 정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 왼쪽부터 순서대로 로버트 파커, 잰시스 로빈슨, 휴 존슨 <사진=Wikimedia Commons>

1978년, 미국인 변호사인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가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어놓았습니다.

'The Wine Advocate'

간결하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저술한 이 책은 곧 와인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고급 와인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와인의 복잡함에 풀이 죽어있던 애호가들에게 훌륭한 와인을 찾아가는 북극성 같은 길잡이 역할로 충분했습니다.

소비자들은 100점 만점 기준의 '파커 방식'에 따라 선택의 기준이 명확해졌으며, 와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와인 비즈니스가 가능해졌습니다.

덜 숙성되었음에도 높은 점수를 받은 와인들은 극적으로 가격이 높아졌으며,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 고급 와인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의 방식은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선두에 휴 존슨(Hugh Johnson)과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이 있습니다.

두 그룹의 와인비평스타일은 '성분의 분석' 과 '미학적 평가'로 나누어 집니다. 파커는 큰, 중량감 있는, 꽉찬, 엄청난 등 양적(量的)개념의 표현과 방식인 반면에, 존슨이나 잰시스로빈슨은 우아함과 미묘함에 집중하는 미학적(美學的)방식의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파커 방식의 양적인 개념과 표현 도구들은 보다 객관적이고 명확해서 소비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잰시스 로빈슨은 "파커의 방식은 와인제조업자들로 하여금 실제로 그들 스스로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들이 제조하고 있는 와인들을 자신의 기호보다 파커의 방식에 맞추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스타일의 와인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 '성분의 분석' 과 '미학적 평가'의 차이 <사진=Pixabay>

서술적 평가와 미학적 평가 사이의 구분은 와인의 평가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 입니다. 전세계의 수많은 갤러리와 큐레이터, 미술 평론가들의 그것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은 두 평가방법 사이에서 혼란스러울수 있을것입니다.

문화는 그 시대의 가치를 반영합니다.

수백 년 동안, 음악과 와인이 인류에게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좋다, 나쁘다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가치와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와인에는 맛과 향의 탁월함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가 무한할 것 같은 감동과 느낌입니다.

진정한 명품이라면 시대를 관통하는 특별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성은 모든 분야에서 존재합니다. 우리 와인 애호가들이 취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좋은 것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음악과 와인을 즐기며 행복감을 누리는 개인과 시대의 취향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진정 훌륭한 와인은 스스로 우리에게 속삭이며 자신을 드러냅니다.

▲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사진=Wikimedia Commons>

"누가 마네(Manet)와 모네(Monet) 의 등급을 매길 생각을 하겠는가?" 
- 휴 존슨

권기훈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의대를 다녔고, 와인의 매력에 빠져 오스트리아 국가공인 Dip.Sommelier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WSET, 프랑스 보르도 CAFA등 에서 공부하고 귀국. 마산대학교 교수, 국가인재원객원교수, 국제음료학회이사를 지냈으며, 청와대, 국립외교원, 기업, 방송 등에서 와인강좌를 진행하였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권기훈 a90049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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