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기다림이 사랑이 될 때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기다림이 있었다."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의 망각>에서 뽑아온 구절입니다.

위에 인용된 '그녀'와 '그' 사이에는 어떤 눈짓도 어떤 몸짓도 없었지만 오직 기다림이라는 말 만이 남았습니다. 이 때 '기다림'은 둘의 관계를 매개하는 유일한 명제가 됩니다.

'그녀'가 와인이 되고 '그'가 내가 되어 어느날 나는 한 병의 와인을 따서 마실 때 나와 와인 혹은 그녀 사이의 공간에는 기다림이라는 언어가 음악처럼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와인은 기다림의 미학으로 불러도 좋은 이유입니다. 사실 이 기다림이라는 단어야말로 와인의 아이덴티티를 적절하게 나타내주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와인의 그녀가 보여주는 유혹이 오만하고 매혹적이긴 하지만 기다릴 줄 모르는 신사에게 그녀는 무감각한 석녀가 될뿐입니다. 모름지기 와인은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듯이 쾌감의 절정을 경험할 수 있어야 훌륭한 와인입니다.

좋은 와인들은 최소 5년 동안의 숙성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술병에서 와인은 미묘한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상대 여인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잘 알아야 기쁨을 함께 나누고 더 사랑할 수 있듯이 와인의 숙성 기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성급한 사랑처럼 그 시음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와인 메이커들이 와인을 양조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려 표현해내고 싶은 요소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어떻게 쾌락과 더 나아가 오르가슴을 한 병의 와인 속에 구현해낼 수 있을까를 고심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와인을 오픈할 때마다 긴장되고 내 가슴은 떨립니다.

오늘의 와인은 포르투갈 알렝떼주에서 온 도나 마리아 아만티스 리제르바 (Dona Maria Amantis Reserva) 2013입니다.

▲ 와인명 아만티스(Amantis)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르투갈어입니다.

쉬라, 쁘띠 베르도, 까베르네 소비뇽, 또우리가 나시오날이 각각 25%씩 배합되었습니다. 짙은 루비색이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여인같은 우아하지만 도도한 모습입니다. 자두 맛과 함께 복합적인 과일향이 보여주는 풍미는 향을 일일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향수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농축된 깊은 맛은 농염한 여인의 팜므파탈을 유감없이 표출합니다. 또한 농축된 텍스처와 어우러지는 유연함이 실키한 타닌감으로 이어져 긴 피니쉬를 제공합니다.

잰시스 로빈슨이 말했듯 '향락적인 느낌의 포르투갈의 향기'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와인은 오픈한 지 두 시간이 지나고도 사랑에 빠질 마음의 준비가 조금 덜 되어 있습니다. 와인 스스로가 응축된 시간을 풀고 자신을 허락해도 좋다는 느낌을 전달해 줄 때까지 디켄팅 시간을 길게 잡아서 더 기다려야 좋을 듯 합니다.

와인명 아만티스(Amantis)는 '사랑에 빠지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르투갈어입니다.
18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태양왕 후앙 5세가 사랑하는 도나 마리아를 위해 선물한 대저택이 지금의 와이너리가 되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포도가 익어가는 역사성을 지닌 도멘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이 와인이 주는 또다른 선물입니다. 로맨틱한 스토리를 지닌 곳에서 만든 이 와인이 추구하는 것은 겨울날 사랑을 나누기 위한 와인이어야 한다고 나는 이해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블랑쇼는 말했습니다. "기다림의 불가능성의 본질은 결국 기다림이다."

사랑과 와인은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 유혹의 신호를 보냅니다. 가을이 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뜨거운 갈망을 안고 조용히 겨울을 기다립니다.
 

마숙현 대표는 헤이리 예술마을 건설의 싱크탱크 핵심 멤버로 참여했으며, 지금도 헤이리 마을을 지키면서 `식물감각`을 운영하고 있다. 와인, 커피, 그림, 식물, 오래 달리기는 그의 인문학이 되어 세계와 소통하기를 꿈꾼다.

소믈리에타임즈 칼럼니스트 마숙현 meehania@hanmail.net

저작권자 © 소믈리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