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거 마셔봐. 셰리라는 와인이야." 
간만에 놀러 온 친구에게 피노 셰리를 내밀었다.
"셰리? 그거 아냐? 셰리의 향기는 오래가요~"

20년도 넘은 광고 음악을 기억해내던 친구는 이내 한 모금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마시면 안 될 것을 마셨다는 표정이었다. 친구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밍밍하고 뜨거운' 맛이었다. 과일 향도 적고, 알코올 도수가 15도여서 와인치고는 도수가 센 편이긴 하다.

▲ 어떤 이는 밍밍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피노 셰리만의 미네랄, 소금이 어린 맛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사진= 김지선>

셰리는 포트, 마데이라와 함께 세계 3대 주정강화 와인 중 하나다. 주정강화 와인은 한자어 풀이대로 높은 도수의 주정(酒酊)을 넣어서 와인의 도수를 강화(强化)한 와인이다. 그래서 일반 와인의 알코올 도수가 9도에서 15도 사이라면, 주정강화 와인은 최소 15도에서 최고 24도까지 이른다. 셰리는 스페인 출신이고, 포트와 마데이라는 포르투갈 출신이다. 유럽 내에서 뜨거운 기후대에 속하는 이 두 나라와 후끈한 기운을 주는 주정강화 와인의 이미지가 잘 겹친다. 그러나 주정강화 와인으로 유명한 산지가 더 있긴 하다. 남프랑스의 뱅 도 나튀렐(Vin Doux Naturel, VDN으로 자주 불린다)이나 이탈리아의 마르살라(Marsala), 그리고 호주의 루더글렌(Rutherglen)도 꽤 심도 있게 주정강화 와인을 만들고 있다.

이 와인들은 와인 입문자보다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많이 사랑받고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양이 적기도 하고, 비발포성 와인과 발포성 와인, 스위트 와인을 거친 후에야 접하게 되는 와인이 주정강화 와인이기 때문이다. '맥주, 소주, 와인(보통 이 경우 레드 와인이다)'의 넓은 분류를 지나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으로 와인을 세분화할 때가 되어야 주정강화 와인의 존재가 인식되는 것이다.

▲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점이 많은 주정강화 와인 <사진= 김지선>

꼭 그래야만 할까? 소주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주정강화 와인의 후끈함은 오히려 일반 와인보다 어필할 수 있는 점이 많아 보인다. 향도 다양해서 굳이 위처럼 순서대로 와인을 접하지 않더라도 거부감 없이 주정강화 와인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와인을 자주 마시지 않는 친구들에게 열 댓가지의 주정강화 와인을 마셔보게 했다. 같은 주정강화 와인이어도 종류별로 매우 뚜렷한 풍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게 가장 맛있는지도 물었다. 이날 준비한 와인은 셰리(피노, 올로로소, 아몬티야도, 크림, PX), 포트(루비, 토니, LBV, 10년산 토니, 콜헤이타), 마데이라(세르시알, 베르델호, 보알, 말바지아), 반율 VDN이었다.

와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예상외로 친구들은 알코올 도수가 높다며 항의했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몇몇 친구는 취향에 따라 각각 셰리, 포트, 마데이라에 선호를 보였다. 이중 재미있게도 모두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은 와인이 있었는데, 바로 마데이라 와인이었다.

▲ 와인 입문자도 좋아하는 주정강화 와인을 찾았다. <사진= 김지선>

마데이라 와인은 포르투갈 본토에서 750km 떨어져 있는 화산섬 마데이라의 특산 와인이다. 17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배에 와인을 싣고 인도로 향하던 중 열대 지역을 오가며 열기에 익어버린 와인이 마데이라 와인의 시초다. 열 숙성을 거친 와인은 독특한 캐러멜, 건포도, 커피 향을 얻었는데, 이처럼 개성이 강한 마데이라 와인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크게 사랑받았다. 심지어 미국은 1776년 독립 선언 시에 마데이라 와인을 건배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제는 와인을 즐기는 사람뿐 아니라 와인에 낯선 사람들까지도 큰 매력을 느끼는 와인이다. 시음자들과의 대면 설문 결과, 다른 주정강화 와인들과 차별되는 마데이라 와인만의 호소력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하나, 다양한 당도

▲ '네그라몰'이라고도 불리는 틴타 네그라 와인의 드라이한 스타일 <사진= 김지선>

드라이 셰리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주정강화 와인은 아주 달콤한 스타일로 만들어진다. 이는 포도즙이 발효하는 하루이틀 사이에 포도 증류주를 넣거나 완성된 와인에 스위트 와인 등을 첨가하여 잔당을 많이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데이라 와인은 주정을 넣는 시기를 조절하여 드라이, 미디엄 드라이, 미디엄 리치, 리치 스타일로 나뉘어 생산된다. 이 섬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포도인 틴타 네그라(Tinta Negra)는 4개의 모든 스타일로 생산된다. 반면 고급 품종으로 분류되는 세르시알(Sercial), 베르델호(Verdelho), 보알(Boal), 말바지아(Malvasia)는 순서대로 드라이, 미디엄 드라이, 미디엄 리치, 리치의 당도가 있는 와인으로만 만들어진다. 따라서 마데이라는 드라이한 맛을 선호하는 사람부터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사람까지 폭넓게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

둘, 높은 산미에서 오는 신선함

마데이라 와인은 주정강화 와인 중 거의 유일하게 산도가 높다. 많은 주정강화 와인들은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자라거나 늦게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지기에 산미가 낮은 편이다(그렇다고 그 와인들이 맛없다는 건 아니다. 내가 최고로 꼽는 와인 중 하나도 빈티지 포트다). 그러나 마데이라용 포도들은 해안가에서, 그리고 세르시알의 경우 최대 800m에 달하는 높은 고도에서 자라기에 최종 와인의 산도가 높다. 그 결과 와인의 잔당은 산미와 균형을 이루며 질리지 않고 마시기 좋은 모습이 된다. 

셋, 말린 과일과 캐러멜 향의 조화

열과 산소에 노출된 와인은 잔당에 따라 밝은 호박색에서 짙은 갈색을 띠며, 견과류, 커피, 녹은 설탕이나 캐러멜 향이 생긴다. 너무 높은 온도에서 숙성이 진행되면 탄 설탕 맛이 나지만 마데이라 와인은 숙성기간 내내 철저하게 온도가 관리되어 이 같은 불쾌한 향이 없다. 다른 고급 와인과 마찬가지로, 마데이라도 전체 숙성 기간이 길어질수록 풍미가 깊어진다. 아주 소량이지만 40년 숙성 마데이라도 생산된다.

뜨거운 열을 거쳐서 잔당 말고는 풍미의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사용된 품종에 따라 와인의 특징이 다르게 나타난다. 드라이한 스타일의 세르시알은 레몬 등 감귤류 향과 견과류 향이 두드러지는 반면, 미디엄 드라이 스타일의 베르델호는 열대 과일과 오렌지 껍질, 시나몬과 같은 달콤한 향신료 향이 강하다. 미디엄 리치 스타일의 보알은 캐러멜, 초콜렛, 커피, 무화과 등의 짙은 향을 내고, 가장 달콤한 리치 스타일의 말바지아는 꿀, 건포도, 캐러멜 향이 강하다.

▲ 주스티노스(Justino's)의 줄리우 페르난데스(Júlio Fernandes) 수출 총괄 책임자 <사진= 김지선>

주정강화 와인은 디저트 와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 얼마전 한국을 방문한 마데이라 와이너리 주스티노스(Justino's)의 줄리우 페르난데스(Júlio Fernandes) 수출 총괄 책임자로부터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보알, 말바지아처럼 달콤한 와인은 크림 브륄레같은 디저트와 물론 잘 어울리지만, 스테이크 등의 고단백질 요리와도 훌륭한 마리아주를 보인다"며 달콤한 마데이라와 스테이크의 궁합을 추천했다. 친구들과의 모임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말바지아를 부어 먹는 것으로 끝냈지만, 다음에는 메인 요리에 마데이라를 곁들이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좋겠다.

김지선 기자는 국제 와인 전문가 자격증 WSET 어드밴스드 과정을 수료후 WSET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와인 강의와 컨텐츠를 통해 전 국민이 와인의 참맛을 느끼도록 힘쓰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김지선 기자 j.kim@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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