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사람도, 와인도 뜨거운 나라 스페인. 유럽 교환학생 시절에 만난 스페인 친구들은 모든 파티에 참여할뿐더러 파티가 없는 날에는 자발적으로 친구들을 모아 밤새 춤추고 술을 마시던 유일한 친구들이었다. 지칠 줄 모르고 파티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의 정신이 와인에 들어간 걸까? 한 모금만 마셔도 목이 뜨끈해지는 스페인 와인은 열정 가득하던 그 친구들을 떠오르게 한다.

▲ 내가 만난 스페인 친구들은 파티의 민족이었다. <사진= Rocïo BM>

스페인에서 만들어지는 레드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기본이 14.5도다. 어떤 와인은 15.5도까지 올라가서 증류주를 넣어 만든 주정 강화 와인 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솔직하고 재미없게 말하자면 스페인 와인의 뜨거운 느낌은 날씨에서 왔다. 뜨거운 태양과 따뜻한 날씨는 포도를 잘 익게 하고, 덕분에 당분이 가득 든 포도가 발효하면서 높은 알코올 도수의 와인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포도나 스페인의 뜨거운 날씨를 견딜 수 있진 않다. 껍질이 두꺼워 천천히 익는 포도만이 강한 햇빛을 받아 응축된 풍미를 가진 건강한 포도로 자란다. 피노 누아 같은 포도가 이곳에서 자란다면? 포도가 익기도 전에 타버릴 것이다.

예외인 곳도 있다.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스페인 서쪽의 리아스 바이사스라는 해안가 지역에서는 산도가 높고 알코올 도수도 12.5도에서 13.5도로 비교적 낮은 화이트 와인이 생산된다. 바닷가의 영향을 받아 서늘하기 때문이다. 이곳의 90% 와인은 알바리뇨라는 청포도로 만들어진 것인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덜 주목받고 있지만 굉장히 신선하고 톡톡 튀는 질감에 누구나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다.

스페인을 처음 들른 여행자의 필수 코스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말라가일 것이다. 스페인 와인에 있어서 이런 도시와 같은 명성을 차지하는 포도 품종은 템프라니요와 가르나차, 베르데요, 알바리뇨다. 스페인 와인을 시도하는 첫 여행자라면 다음의 대표 포도로 만든 와인을 추천한다.

템프라니요(Tempranillo)

▲ 리오하에서 템프라니요 품종으로 만든 무가 레세르바(Muga Reserva) 2014 <사진= 김지선>

2010년 기준, 템프라니요는 전 세계에서 4번째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었다. 종종 스페인의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비유되곤 하는데, 스페인의 주요 와인 산지에서 고급 템프라니요 와인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템프라니요는 껍질이 두껍고 색이 짙다. 이러한 특징은 타닌 성분, 즉 폴리페놀이 많아 장기 숙성력이 우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르나차나 보발, 모나스트렐을 대체할 품종으로 주목받고 있다.

서늘한 곳에서 자란 템프라니요는 향이 약할 수 있으나, 생산량과 와인 양조 기술에 따라 최종 와인 스타일이 결정된다.  딸기, 향신료, 가죽, 담뱃잎 등의 풍미를 드러낸다.

리오하에서는 가르나차 포도와 종종 블렌딩 되는데, 가르나차보다 약 2주 정도 빨리 익어서 고도가 높고 대서양의 영향을 받는 리오하 알타와 리오하 알라베사에서 상당량 재배된다. 이외에 리오하 내에서 마주엘로(카리냥), 그라시아노, 비우라와도 블렌딩 된다. 카바의 주요 생산지 페네데스에서는 모나스트렐과 블렌딩되어 전체 와인을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나바라와 카스티야 라 만차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처럼 국제 품종과 종종 블렌딩된다.

스페인은 유난히 지역마다 포도를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다. 템프라니요가 그중 하나인데, 발데페냐스에서는 센시벨(Cencibel)로,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는 틴토 피노(Tinto Fino)로 부른다. 이외에 틴타 마드리드, 탄타 델 파이스, 틴타 데 토로 등으로도 불린다. 또 옆나라 포르투갈의 알렌테조 지역에서는 아라고네즈(Aragonez)로, 도우로에서는 틴타 호리츠(Tinta Roriz)로 불린다. 틴타 호리츠는 도우로 계곡을 중심으로 하여 포르투갈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기도 하다. 이밖에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에서도 소량 재배되고 있다.

붉은 과일- 체리, 사우어 체리, 딸기
말린 과일- 무화과, 건포도, 건 블루베리
오크- 바닐라, 시나몬, 초콜릿, 코코아, 담뱃잎
허브, 꽃- 말린 장미, 마른 잎사귀, 후추, 말린 로즈마리 
기타- 자갈, 가죽

모나스트렐(Monastrell)

▲ 스페인 남동부 후미야 지역에서 모나스트렐 품종으로 만든 후안 길 실버 라벨(Juan Gil Jumilla Monastrell) 2015 <사진= 김지선>

적포도 품종 중 스페인에서 3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포도다. 무르시아(Murcia)와 카스티야 라 만차에서 주로 생산되며, 프랑스에서는 무르베드르로 불린다.

싹을 틔우고 숙성하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따뜻한 기후의 스페인이 모나스트렐을 기르기에 적합하다. 이 품종은 기후만 따뜻하다면 다양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생산량도 많다.

알코올과 타닌이 강하며 보졸레 지역의 품종 가메처럼 동물성 향이 많으나, 산화와 환원 현상을 피한다면 좋은 숙성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실향이 두드러지며, 특히 블랙베리향이 많다.

스페인 외 지역에서는 무르베드르로 불리는데, 프랑스의 샤토뇌프 뒤 파프나 방돌, 랑그독, 루시용에서 주로 생산된다. 특히 샤토뇌프 뒤 파프에서는 시라보다 무게감이 있고 그르나슈나 생소보다 팽팽해서 시라, 그르나슈와 함께 자주 블렌딩된다.

검은 과일- 블랙 커런트, 블루베리, 아사이 베리, 블랙베리
기타- 구운 고기, 담배, 훈연, 코코아, 화분
오크- 바닐라, 커피, 모카
허브- 후추, 라벤더, 세이지, 펜넬, 오레가노
기타- 잼

가르나차(Garnacha)

▲ 칼라타유드에서 가르나차 품종으로 만든 호노로 베라 가르나차(Honoro Vera Garnacha) 2015 <사진= 김지선>

프랑스에서 그르나슈로 불리는 가르나차는 론과 프리오랏에서 성공을 거둔 뒤 점점 주목받는 품종이다. 단일 품종으로 또는 템프라니요와 블렌딩된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리오하, 나바라, 보르야, 카리녜냐, 마드리드, 라 만차, 페네데스, 프리오랏, 소몬타노, 타라고냐 등 스페인의 여느 와인 산지에서나 재배되는데, 최고급 와인은 프리오랏에서 생산된다. 오래된 나무에서 생산된 가르나차는 카리냥과 블렌딩되어 응축력있는 컬트 와인으로 만들어진다. 최근에는 메를로나 카베르네 품종이 블렌딩에 함께 쓰이기도 한다.

리오하에서는 템프라니요와 블렌딩되어 속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서늘한 리오하 알타가 템프라니요를 위한 지역이라면 따뜻한 리오하 바하는 가르나차를 위한 산지다. 나바라에서는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으로 사랑받고 있다. 여기서는 리오하보다 가볍고 과실 향이 많은 레드 또는 로제 와인으로 생산된다.

모나스트렐보다 타닌과 산미가 부족하지만, 과실향은 강한 특징을 보인다.

붉은 과일- 라즈베리
검은 과일- 구운 플럼, 블랙베리
마른 과일- 프룬, 무화과
허브- 히비스커스, 라벤더, 유칼립투스, 감초, 로즈마리, 주니퍼, 정향, 후추
오크- 초콜릿, 바닐라
기타- 홍차, 화분, 가죽, 자갈

알바리뇨(Albariño)

알바리뇨는 스페인 서해안에 있는 리아스 바이사스, 그 안에서도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리아스 바이사스의 포도밭 중 절반 이상에서 알바리뇨가 재배될 만큼 현지에서 인기가 좋다. 레몬이나 오렌지 껍질처럼 상큼하면서도 씁쓸한 감귤류 향이 두드러지고, 해안가에서 자라는 만큼 미네랄 풍미가 더해져 있다. 서늘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청포도 품종은 주로 감귤 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티올(thiols)이라고 불리는 향기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피노 그리지오나 소비뇽 블랑에도 이 성분이 들어있다.

포도 껍질이 두꺼운 덕에 곰팡이의 피해를 적게 받고 알코올, 산도, 풍미를 유지할 수 있다. 아로마틱한 품종이어서 포도 자체의 풍미를 살린 청량한 스타일로 만들어지나, 가끔 오크 터치를 더해 숙성력을 높이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비뇨 베르데(Vinho Verde)지역에서도 자라는데, 여기서는 'Albarinho'라고 다르게 표기한다.

감귤류- 레몬, 레몬 껍질, 자몽, 오렌지 껍질, 귤
교목류- 복숭아, 사과
허브- 릴리
기타- 미네랄, 소금물, 자갈

마카베오(Macabeo)

▲ 리오하에서 비우라, 가르나차 블랑으로 만든 리오하 발렌시소(Rioja Valenciso) 2012 <사진= 김지선>

마카베오는 아이렌에 이어 청포도 중 스페인 서부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품종이다. 리오하, 카탈루냐, 갈리시아, 카스티야 라 만차 등 스페인 와인 산지 곳곳에서 마카베오를 만날 수 있다. 리오하에서는 '비우라(Viura)'라고 불린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숙성된 와인은 주로 신선하고 꽃향기 및 과일향이 풍부한 모습을 보여주나, 오크 통에서 숙성될 경우에는 무게감 있고 꿀 향 및 견과류 향을 드러낸다. 스틸, 스파클링, 스위트 와인 등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만들어지는데, 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 카바를 만들 때는 파레야다(Parellada), 사레요(Xarello)와 함께 거의 필수로 사용된다.

이 품종은 생산력이 좋지만, 포도가 매우 천천히 익기 때문에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스페인 법에 따르면 레드 와인에는 10%까지, 로제 와인에는 30%까지 마카베오를 혼합하는 일이 허용된다.

마카베오는 프랑스 남부로 넘어가서도 잘 정착했다. 루시용에서는 마카베오의 큰 특징이 없는 점을 살려 로제 와인 블렌딩용으로 사용된다. 랑그독의 미네르부아와 코르비에르에서는 부르불랑 및 그르나슈 블랑과 블렌딩 된다.

베르데요(Verdejo)

스페인 루에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청포도 품종이다. 산도가 높고 과일, 허브향이 향긋하여 비슷한 특징의 소비뇽 블랑과 블렌딩 되기도 한다. 수백 년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1980년대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루에다에서 와인을 만들며 인기를 되찾았다. 스페인 외의 국가에서는 자라지 않는 토착 품종이다.

스페인의 대표 와인 산지

리오하: 해외에 가장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대표 산지다. 와인 산지는 진흙 토양의 리오하 알타, 석회암 토양의 리오하 알라베사, 다양한 토양의 리오하 바하 세 구역으로 나뉜다. 19세기 후반 보르도 네고시앙이 이곳에 진출하며 리오하의 와인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 1970년대까지는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숙성하여 바닐라향이 짙은 와인이 일반적이었으나, 이후 프렌치 오크를 사용한 현대적인 스타일의 와인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주로 템프라니요, 가르나차 등 적포도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나, 청포도 품종인 비우라, 말바지아, 가르나차 블랑카도 함께 재배되고 있다.

리베라 델 두에로: 1980년대 이후부터 급격한 품질 상승이 일어난 곳. 틴토 피노, 틴토 델 파이스(템프라니요)가 주 품종인 레드 와인 산지다. 베가 시실리아, 도미니오 드 핑구스, 알토 등 최고급 와이너리가 리베라 델 두에로에 있다.

루에다: 70년대까지는 팔로미노를 이용한 주정 강화 와인을 만들었으나, 최근에는 과일 풍미가 풍부한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70년대부터 루에다에서 화이트 와인을 만들며 인기를 얻었다. 소비뇽 블랑만큼 산미가 훌륭하며, 미네랄 풍미를 끌어모으기 위해 평범한 소비뇽 블랑보다 늦게 수확한다.

김지선 기자는 국제 와인 전문가 자격증 WSET 어드밴스드 과정을 수료후 WSET 디플로마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와인 강의와 컨텐츠를 통해 전 국민이 와인의 참맛을 느끼도록 힘쓰고 있다.

소믈리에타임즈 김지선기자 j.kim@sommelier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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